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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천년 교섭사에 첫 원수 대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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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두환대통령의 9월 방일은 그 성격이나 의의에 있어 그전에 있었던 네 번의 정상외교와는 매우 다르다.
이번 방일은 만나서 대화하고 이해를 심화시키며 걸려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통상적인 외교의 차원을 훨씬 넘어 한일 두 민족에게 다같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되는 상징적·역사적 의미를 더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 민족 간의 2천년 교섭사에 있어 처음으로 두 나라 국가원수간의 대면이 실현되고, 일제에 의한 최근세 40년의 민족침탈에 대해 일황이 사과의 뜻을 표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번 전 대통령의 방일은 한일관계사의 신기원이 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65년 한일 기본조약의 체결로 두 나라간의 형식적인 관계는 정상화 되였지만 40년간의 주권강탈과 민족착취가 이로써 다 청산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국교정상화 후에도 국민적 감정 때문에 우리의 대일관계는 문자그대로 정상화되지는 못 했으며 이것은 일본측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국민의 대한 감정과 가학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의 대한관계도 비정상요소를 안은 채 지속돼온 것이다.
전대통령의 방일은 이처럼 양국관계의 발전에 항상 장애가 돼온 가학·피학의 비정상적 경험을 극복하여 피차 콤플렉스 없는 정상적인 선린관계를 시작하자는 두 나라 정부의 공통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가까운 나라들 간에 당연히 가져야할 자세를 이제부터 서로 가져나가자는 양국의 공동다짐이 전대통령의 방일을 실현시킨 것이다.
특히 두 나라 원수간의 사상 최초의 대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 자리에서 일황은 어떤 표현으로든 일제의 대한침략을 사과할 것으로 보이는 데 그 사과가 정치적으로 사전 조정된 언사이든 아니든 2천년의 장구한 관계를 지니는 두 나라의 국가원수간 초대면에서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는 것은 두 민족간 화합의 의식이 아닐 수 없다. 이 의식을 보다 더 잘 치르기 위해 사과의 강도와 표현이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대통령의 방일은 지금까지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였던 두나라 간의 온갖 비정상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진정한 선린관계를 시작해 나가자는 계기로서의 뜻이 있다. 그러나 이런 계기가 마련된 것만으로 곧 두 나라가 참다운 선린관계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이 계기를 두 나라 정부와 국민이 어떻게 살려나가고 활용해 나가느냐하는 노력에 따라 양국정부가 바라는 진정한 우호협력관계에 이를 수도 있고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원래 근접한 두 단일민족의 국가 간에는 협력·우호관계도 있지만 대립 경쟁관계가 더 두드러진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독-불, 영-불의 역사적 관계가 그런 예다. 한일 간에도 문화를 전승하고 평화적인 선린관계를 유지해 온 기간도 있었지만 고대·중세의 왜구와 16세기 연이은 두 차례 왜침, 최근세의 일제침략 등 쓰라린 역사도 많았다.
오늘날에도 두 나라 국민은 함께 조용필의 노래를 즐겨 부르고 많은 분야에 걸쳐 문화의 특성을 공유하고있지만 여론조사의 결과는 서로 『가장 싫어하는 나라』로 상대방을 생각하고있는 형편이다.
많은 일인들이 자기들의 문화의 원류가 한국에서 유래함을 인정하고 이성적으로는 대한 우호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사회의 대한자세는 항상 경멸·편향이 대세로 되어왔다.
많은 한국민 역시 개인적으로는 일본에 배울 것이 많다고 하고 실제 일본적인 요소를 스스로 즐기기도 하면서도 대일문제에 관해서는 항상 강경하고 심지어 이해타산을 초월하는 사례가 많다.
상대방에 대한 두 나라 국민의 이 같은 이중사고는 오랜 역사의 산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최근세 36년간에 걸쳤던 일제의 공전의 잔학한 한국강점에서 대부분 빚어진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양국민간의 태도 때문에 45년 일제패망이 있은 지 20년만에야 겨우 한일기본조약의 체결이 가능했고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지난 뒤에야 두 나라 원수간의 대면이 실현되게 된 것이다.
한일관계는 이처럼 어려운 걸음으로 정상화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이번 전대통령의 방일로 양국정부가 이룩하고자 하는 진정한 선린관계의 구축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과거사가 남긴 감정적·심리적 갈등요소를 같이 극복해 나가는 진정한 노력이 성의있게 지속적으로 전개돼야 참다운 한일 새시대의 관계가 정립될 수 있다.
우선 일본측은 한일국민간의 심리적 갈등요인이 생성된 역사적 인과관계에 착안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진정한 반성 없이 민주일본으로서의 실체는 객관화되기 어렵다. 해방 후 끊이지 않은 일본요인들의 일련의 대한망언 (구보전·전중·원전…) 이나 「일한공동운명체」 니 「한국은 일본의 생명선」이니 하는 신판 군국주의적 발언을 보면 일본은 아직도 일제에 대한 반성이 약하며 오늘의 「과」 가 나오게된 「인」을 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동남아 각 국이 아직도 일본을 경계하고 일본인을 배척하는 까닭을 일본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민족의 경우 오늘날 겪고있는 모든 고통의 원천이 일제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가장 큰 고통의 원천이 분단에 있다면 분단은 궁극적으로 일제에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참다운 선린관계를 정립할 이 모처럼의 계기를 맞아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는 자세를 보이는 게 바람직하다. 양국민간의 진정한 화해는 그런 자세에서라야 가능하다.
일본이 경제대국을 자처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국제적 영향력을 못 갖는 원인의 하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한국과의 관계마저 올바른 신뢰의 바탕 위에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일본과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객관적 여건을 냉철히 따져보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우리에 대한 일본의 비중이 일본에 대한 우리의 비중보다 무겁고 큰 현실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동시에 과거사가 주는 교훈도 잊지 말아야 일본과의 대등한 파트너가 가능할 것이다.
단기의 경제적 실리 때문에 원칙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시대에 걸맞지 않은 폐쇄적 원칙에 언제까지나 사로잡혀서도 곤란하다.
전대통령 방일이란 두 나라 국민의 역사적 화해의 계기를 양국이 진정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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