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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잉크와 함께한 40년 만화의 진수성찬 차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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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호 24면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 많이 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예술의전당 첫 국내 만화 전시회 ‘허영만展’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허영만展 창작의 비밀’(4월 29일~ 7월 19일)은 만화가 허영만(68)씨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1974년 데뷔 후 선보인 작품 제목을 일일이 손으로 써내려가다 보니 무려 215편에 달했다. 지난달 28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이를 두고 “만화 문화가 겪었던 불행한 시대의 산물”이라고 했다. 한 달에 3권씩은 그려 대야 했던 시절. 그는 불행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반대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원화 15만 장, 드로잉 5000점이라는 방대한 기록을 만나볼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콧대 높은 예술의전당이 국내 만화가에게 처음으로 공간을 내어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각시탈

허영만의 분신이자 자식인 ‘이강토’
41년간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전시장에 들어서면 허영만의 엄지 손가락 지문을 형상화한 대형 구조물이 관람객을 맞는다. 일평생 작업한 종이들이 모여 그의 인생을 구성해 온 것처럼 구불구불 이어진다. 대중에게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각시탈』(1974). 『집을 찾아서』(1974)로 소년 한국도서 신인 만화가 모집을 통해 데뷔한 지 5개월 만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주인공 이강토는 이후 허영만의 분신이자 자식이 됐다. 일제시대 항일 투사를 때려잡던 헌병 강토는 형 대신 각시탈이 되어 항일 투사의 선봉이 됐고,『오! 한강』(1988)에서는 혁명의 꿈에 부풀어 월북한 화가로 분한다. 스토리작가 김세영과 함께 한 첫 작품인『카멜레온의 시』(1986)는 프랑스 시인 로트레아몽의 글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청춘의 고뇌를 극대화시키기도 했다. 타고난 운명과 놓여진 역경은 달랐지만, 그 시절 있음직한 인물을 통해 만화도 사유할 수 있음을, 함께 자라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전시를 기획한 정형탁 큐레이터는 “가슴에 가진 저만의 캐릭터와 함께 그 당시 기억도 되살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시장 곳곳에 불어넣었다. 50대 관객이라면 최초 공개되는 『각시탈』초판본에 가장 가슴이 설렐 터. 한 땀 한 땀 오려 붙인 말 풍선과 깨알 같은 수정사항을 읽다 보면 그 시절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200호 대형 캔버스에 옮겨진 원화를 살펴보다 그 시절 함께 울고 웃던 나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카멜레온의 시

“난 항상 2등 … 아무도 없는 곳에 있어 1등 같을 뿐”
허 작가는 굳이 창작의 비밀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캐릭터, 연출, 스토리 모두 말한다고 쉽사리 따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작품 활동의 비결로 ‘근면’을 꼽았다. 전시장 한 켠을 장식한 하루 일과를 보면 오전 5시면 일어나 화실로 향해 신문을 펼치고 7시간 동안 작업을 한다. “저는 항상 2등이었어요. 지금은 1등이 된 게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어서 1등처럼 보이는 거죠.”

허나 이것이 지나친 겸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 역시 전시장 곳곳에 널려 있다. 일상의 단편도 허투루 넘기지 않은 메모가 한 쪽 벽을 가득 채우는가 하면, 누가 원고료 주는 것도 아닌데 22권째 그려온 만화 일기도 빼곡히 걸려 있다. 세상의 신호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은 적이 한 시도 없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랄까. 전쟁터에 나간 군인처럼, 항상 ‘총알’을 장전해놓고 있지 않는 만화가는 다음 작품을 선보일 수 없다는 신념에서 나온 습관이기도 하다.

꼼꼼한 취재의 연보는『동체이륙』(198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 적부터 오토바이에 열광했던 그는 관련 잡지 25여 권을 스크랩해 붙여 놓고 쳐다보며 그림을 그렸다. 이는 『아스팔트 사나이』(1992)『타짜』(2000) 등을 거치며 더욱 공고해진다. 덕분에 “자동차의 메카인 미국 디트로이트의 공장은 높은 임금 때문에 멕시코로 이전하게 될 것” 같은 대사는 2년 후 현실이 됐고, 재벌과 밑바닥을 오가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독자들은 현실보다 더 사실적인 재현을 맛봤다. 이렇게 세 박자가 맞아떨어진 덕에 영화와 드라마로 재탄생했던 그의 작품들 역시 소품과 함께 전시의 재미를 더한다.

서울 수서 작업실에서 작품활동에 열중하고 있는 허영만 작가(위). 그는 하루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낸다. 아래는 숨이 멎는 그날까지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는 그의 의지가 담긴 만화일기.
제7구단

“만화는 생활에 지친 현대인에게 청량음료”
하지만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계속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지친 우리를 위로한다는 데 있다. “만화는 재밌어야 합니다. 생활에 지친 현대인에게 청량음료와 같은 것입니다.”

스포츠ㆍ음악ㆍ요리로 이어지는 계보는 이 같은 고민의 산물일 게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80년대 권투와 야구는 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불공평한 복싱 경기에 야유하는 관객들은 『무당거미』(1980)를, 구단이 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제 7구단』(1985)을 탄생시켰다. 필요와 충분 조건이 만나는 지점에서 대중의 대변자 역할을 한 셈이다.

이렇듯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그에게 마르지 않는 소재의 샘이 되어주었다. 아이들이 일본 만화 『드래곤볼』을 보자 그는『서유기』의 전혀 다른 해석인 『날아라 슈퍼보드』(1989)를 내놓았고, 이는 TV 애니메이션 역대 최고 시청률인 42.8%를 기록했다. 이제 아이들이 커버려서 어린이 만화는 그릴 수 없다고 했지만 그의 관심은 만인이 하루 세 번은 생각하는 음식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식객』(2003)을 그렸고, 잘 마시지도 못한다는 커피를 소재로 『커피 한 잔 할까요?』(2015) 연재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허 작가는 계속 다음 작품을 이야기했다. 실버 세대를 위한 만화를 그리고 싶다 했고, 얼마 전 외국계 은행에 다니는 사위한테 들은, 돈을 잃은 사람들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고도 했다. 대중의 애호를 좇으면서도 그 안에서 생겨나는 갈증을 채워주고자 했던, 참으로 그다운 행보다. 비록 『각시탈』의 허영만을 몰라도 『식객』의 입체 캐릭터를 즐길 수 있고, 그의 문하생이었던 윤태호의 『미생』원화를 보며 기뻐할 수 있는 힘 역시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멈출 줄 모르는 진화가 계속된 덕에 우리는 세대의 단절 없이 그의 작품을 즐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플레인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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