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취향은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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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호 31면

아는 사람 중에 클래식 음악을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세상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도 늘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는다.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는 그녀에게 값비싼 옷이나 명품 가방 같은 것은 관심 밖의 일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문화생활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빠듯한 살림에도 생활비를 쪼개 클래식 음반을 사거나 엄청나게 비싼 해외 오케스트라의 내한연주회에도 과감하게 돈을 쓴다.

그런데 이런 그녀에게 한 가지 고민이 있다. 남편과 문화생활을 함께 하고 싶은데 정작 자기 남편은 음악이니 그림이니 연극이니 이런 것에는 통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보편적 기준으로 볼 때 그녀의 남편은 그다지 나쁠 것도,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보통 남자’다. 그 세대 다른 남자들이 그렇듯 그도 한국 전쟁 직후 베이비 붐 시대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 나라와 가족을 위해 평생 허리가 휘도록 일만 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보니 음악이니 그림이니 연극이니 즐길 여유가 없었고, 문화적 안목을 키울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문화적 소수자가 되었다.

그녀는 늘 자기 남편에겐 ‘취향’이라는 것이 없다고 불평을 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본인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갑자기 밖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타인의 취향’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생각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카스텔라는 그 동안 문화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왔다. 생전 연극을 본 적도 없고, 클래식 음악을 들은 적도 없으며, 소설을 읽은 적도, 그림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날 난생 처음 연극이라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는다.

이 연극의 여주인공 클라라는 아르바이트로 카스텔라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그녀는 카스텔라를 문화적 소양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무식쟁이로 생각하고 은근히 무시한다. 하지만 어느덧 그녀를 좋아하게 된 카스텔라는 클라라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예술계에 종사하는 그녀의 친구들과 어울리려 노력한다. 때로 술값과 밥값을 내주기도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조롱뿐이다. 관객을 많이 모으려면 웃기는 연극을 해야 한다는 카스텔라의 말에 클라라의 친구들이 “입센의 ‘인형의 집’이 정말 웃기는 연극이야. 특히 로라가 집 나갈 때 얼마나 웃겨”라고 말하며 폭소를 터뜨려도 그것이 자기를 놀리는 것인 줄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클라라의 화가 친구가 전시회를 연다. 전시된 그림은 어두운 색조의 추상화인데, 카스텔라는 묘한 표정으로 찬찬히 그림을 돌아보다가 그 중 한 점을 구매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그 화가에게 자기 회사에 걸 대형벽화를 주문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클라라는 화가인 친구가 카스텔라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 보는 안목이 없는 카스텔라가 자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기 친구에게 벽화를 부탁했고, 친구는 이런 그의 마음을 이용해 큰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자신을 찾은 클라라에게 카스텔라는 이렇게 말한다.

“난 그림이 좋아서 샀는데 뭐가 문제지요. 내가 왜 그림을 샀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근사하게 보이려고? 아주 잠깐이라도 내가 그 그림이 좋아서 샀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클라라가 보기 좋게 한 방 얻어맞았다. 카스텔라의 이 말은 스스로 고급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허위의식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카스텔라처럼 생전 그림이라고는 본 적 없는 사람이, 생전 클래식 음악이라고는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우연히 맞닥뜨린 그림과 음악에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함부로 취향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어느 순간, 잠자고 있던 그의 취향이 눈 뜰 날이 올지니.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 hwesook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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