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1944년 7월 그날의 화폐전쟁, 세계의 중심에 올라선 달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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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브레턴우즈 전투
벤 스틸 지음, 오인석 옮김
아산정책연구원
592쪽, 2만원

미국이 하면 로맨스고 중국이 하면 불륜인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 몇 년간 자금을 다량으로 풀어 달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췄다. 그 결과 미국은 경기 회복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평가다. 중국에 대해 “수출을 촉진하고 수입을 억제하려고 위안화 가치를 낮게 ‘조작’하고 있다”고 했던 그간의 비판이 무색해진다. 이처럼 자국 통화 가치를 낮춰 이익을 얻으려는 통화민족주의는 이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탁류가 되고 있다.

 글로벌 기축통화인 달러화가 이런 상황이 되자 전세계가 들썩거린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유로화를 무진장 공급하는 양적완화 정책을 펼치고, 일본도 엔저 정책으로 수출경쟁력 강화를 꾀한다. 한마디로 국익이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국제통화 질서확립이라는 고상한 이상론은 빛이 바랬다.

 미국외교협회 국제경제국장이자 선임연구원인 지은이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달러화 중심의 국제통화체제를 발족했던 1944년 7월의 브레턴우즈 회의를 떠올린다. 당시 ‘떠오른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 44개국 대표를 모아놓고 국제통화시스템을 국제기구가 관리하는 체제를 발족시킨 역사적인 회의다.

 지은이는 브레턴우즈 체제를 만든 두 주인공인 영국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1883~1946)와 미국 재무부 고위관리였던 해리 텍스터 화이트(1892~1948)의 당시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그린다. 전쟁으로 파산 직전에 이른 영국이 간청하자 미국은 기축통화와 국제통화체제를 송두리째 바꿀 이 회의를 주재했다. 이상론과 현실론간에 펀치가 오가고, 필사적인 힘겨루기 끝에 각국의 이해를 조정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미국 달러화는 이런 과정을 거쳐 영국 파운드화를 대신해 국제금융체제를 이끌 새로운 기축통화의 지위를 차지했다.

 이제는 사실상 수명을 다한 이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브래턴우즈 체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2008년 당시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가 제안했다. 하지만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보유 외환 4조 달러 중 60%가 미국 국채인 중국도 아직은 새 체제를 제안하거나 논의를 이끌 권위가 부족하다. 당분간 대안 없이 달러화를 실질적인 기축통화로 인정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계속될 전망이다.

 44년의 기록을 다시 살펴보면 현재 상황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 대표였던 화이트는 사실 소련 사회주의 신봉자였다. 그는 48년 스파이 혐의로 연방수사국(FBI)의 심문을 받은 직후 심장마비로 숨졌다. 소련 통신을 도·감청한 FBI 자료는 혐의가 사실임을 입증한다. 국제통화체제의 재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대전’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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