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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열정 페이'의 세상이지만 '열정 총량의 법칙'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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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

퇴근길 한 카페에서 결국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주문받을 생각은 않고 동료와 웃고 있는 알바생.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여기, 주문 안 받아요?” 짜증 섞인 목소리에 걸맞은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하세요”.

 “밀크 아이스크림 하고...” “밤 10시 넘어서 마감됐어요. 안 돼요.” 알바생이 싹뚝 잘랐다. “그럼, 뭐가 돼요?” 서로 어색해질 정도의 격한 말투였다. 확실히 내 쪽이 오버였다. 머쓱해진 나는 먹지도 않을 아메리카노를 얼른 주문해 받아들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날 내가 ‘퇴근길 진상녀’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점심 짬을 내 들은 철학가의 강의가 문제였다. “월급이 반으로 줄어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할 건가요?”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안 되죠. 살아있는 언론인이라면, 그것(돈)과 관계없이 해야죠. 그게 열정이죠.” 곧 다가올 월급날을 잔뜩 기대하던 언론인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이 시대 젊은이에게 “열정이 부족하다”는 건 최고의 비난이 아니던가.

 그 화를 애먼 알바생에게 쏟아낸 거였다. 커피숍을 걸어 나오는 내 뒤에서 김수영 시인이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를 읊는 듯했다.

 집에 와보니 박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주문한 여행책 몇 권과 봄맞이 산행 때 입을 등산복이다. 책을 읽고 등산복의 스타일을 구상하느라 나는 그날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신랑 말대로 “열정 돋는 모습”이었다. 서른세 살의 봄. 내 열정은 잠시 사고현장도, 회식 자리도 아닌 이곳에서 빛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열정으로 승부하라, 백만 불짜리 열정, 열정으로 세계를 컨트롤하라.... 이런 이름이 붙은 책을 쓴 작가들도, 열정이 없으면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을 남긴 유명인들도 어쩌면 하나같이 다 성공한 CEO들 뿐인지.

 우리 사회에 ‘열정’이 비즈니스 모델이 된 느낌이다. 솔직히 나는 열정에도 총량이 있다고 믿는다. 너무 2035세대에게만 열정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거슬린다.

얼마 전 제작에 들어갔다는 영화 제목이 마음에 든다.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솔직히 열정만으로 살 수 있다면, 우리나라 헌법부터 ‘대한민국은 열정 공화국이다’라고 바꿔야 할 듯싶다. 마구 열정만 윽박지르는 것은 ‘착취’가 아닐까 조심스레 의심해 본다. 하지만 이 싱싱한 젊음을 단지 돈과 치환하는 것도 무리다. “배우가 가장 연기를 잘할 때는 돈이 없을 때”라는 배우 윤여정씨의 말이 그렇다. ‘열정’과 젊음이 언제부터 이렇게 대립적 개념이 됐을까.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