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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한일회담(248)일본새수석「다까스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나는 65년 정초 한일회담의 중단여부를 결단해야할 중대한 위기를 맞이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감정에 치우쳐 한일관계정상화를 또다시 수년간 미루게될 행동을 자제하는 선에서 원만한 수습을 하는 쪽을 택했다.
위기의 실체는 새로 취임한 일본측 수석대표의 망언이었다.
「스기」(삼도조)수석대표는 64년12월14일 그의 생활무대인 오오사까 (대판)에서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이께다」 전수상과 막역한 사이였던 「스기」 씨는 80세의 노령으로 일본수석대표를 맡았던 실업인이었다.
「사또」 수상은 「스기」씨의 후임으로 또 재계인사를 물색해 「스기」 싸와 마찬가지로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일본외무성은 차석대표인 「우시바」심의관을 수석대표로 밀었으나 「사또」 수상은 정치적인 결단을 내릴때 재계가 개입 또는 관련되어 있는것이 편리하다는 일본적 정치상황을 고려해 자신과 친분이 깊은 미쓰비시(삼능)전기 상담역 「다까스기」(고삼진일)씨를 선택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다까스기」 씨는 수석대표 취임권유를 받고 상당히 고사했으나『이제 나이 72세에 한일회담타결로 흠이 좀 간들 무슨 상관이냐』 는 재계중진들의 종용을 받고 수락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동경제대법대를 졸업한후 미쓰비시 은행에 입사한 이래 평생을 미쓰비니 재벌 안에서 일해온 일본 금융자본주의의 영웅이자 일본 재계의 거물이었다.
일본정계에 항상 영향력을 미쳐온 재계인맥 중에서도 그는 우익으로 평이 나있었으며 낡은 표현을 빈다면 「국사」 풍의 인물로서「사또」내각 탄생에 협조한 재계주류파에 속했다.
그는 1월6일 취임을 승낙하면서 「사또」수상을 만나 한일교섭은 정식 외교 창구를 통해 해야하며 막후절충을 배제해야하고 경제협력에서 있을 수 있는 여러의혹을 일소해야 한다고 강조해「사또」 수상으로부터 전폭 지지를 받았다.
그는 또 「사또」 수상에게 일본정부의 회담에 임하는 확실한 방침을 요구해 「사몬 수상으로부터 3월내로 대강을 타결, 5월중순께 비준을 끝낼 의향이라는 시간표까지 얻어낼 만큼 적극 자세를 보였다.
그는 수락 전후의 회견을 통해서도 『평화선문제등은 뒤로 돌리고라도 양국간의 국교는 조기정상화돼야 한다』
『한일문제를 그대로 두고 아시아 외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는 등의 발언을 통해 그의 우익성향을 뚜렷이 했다.
그는 또 자신이 경단련의 경제협력 위원장임을 상기시키고 한일 양국간의 경제협력에 정열을 가지고 있으며 경협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국교정상화가 필요하다고역설하고 『나는 지난번의 「스기」수석대표처럼 죽을 때까지 회담대표로 남아 있지는 않을것』이라고 조기타결 의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나는 이같은 그의 배경과 회견내용을 알고 비록 그가 직업외교관 출신의 수석대표가 아닌 불만은 있었지만 이야기가 통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8일 하오 「시이나」외상의요청을 받고 가스미가세끼의 외무성 대신실을 방문해 처음으로「다까스기」 씨와 상견례를 치르고 며칠후 정무협의차 귀국했다.
정무협의를 끝내고 16일 하오 동경에 귀임하니 일이 벌어져 있었다.
「다까스기」 수석대표가 1월7일가스미가세끼 구락부(일본외무성출입기자단)와의 회견중 한말이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에 보도되어 말썽의 소지를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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