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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 새참에 도급모심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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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바둑판 모양으로 정리된 66㏊ 널따란 들판.
싱그런 6월의 아침햇살이 물잡힌 논배미마다 가득 가득히 괴어간다. 경남 울산시교외 송정들-.
상오6시 송정 시외버스 정류장에 경주행 시외버스가 멎었다. 30∼40명의 부녀자들이 손에 손에 비닐쇼핑백을 하나씩 든 차림으로 줄지어 내린다.
『어서 오이소. 일찍들 오셨구만. 고맙십니더.』
아까부터 정류장에 나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이석암씨(63·울산시 송정동)가 그중 한 부인을 보고 반색을 하고 달려간다.
『여깁니더, 이리 오시이소』한쪽에서 누군가 다른 한그룹을 부른다.
『열명 다 왔심더. 덥기전에, 일찍일찍 하입시더. 어딘교.』
「오야지」김옥춘씨(47)가 앞장을 서 10명의 부녀자들이 이씨 뒤를 따른다.

<젊은이 농촌떠나>
모내기철을 맞아 울산시내서 근교농가로 모심기 일을 나가는 날품부녀자들의 출동이다. 오늘은「오야지」김씨가 10명을 데려오기로 약속, 8마지기 논의 모심기에 나서는 것이다.
『예전에는 동네사람들끼리 품앗이를 했지예. 그러나 지금이사 젊은 사람들은 다 공장에 일하러가고 어디 일손이 있는교. 놉 얻어서 심어야지예. 해마다 이 송정들 모내기는 거반 울산시내 놉꾼 아지매들이 할것이구마. 품삯·비료·농약값은 해마다 오르제 농사지어봤자 남는 것이 없다 아입니꺼.』
송정들에서 15마지기 농사를 대물려 짓고 있는 이씨의말. 놉꾼 아줌마들의 하루품삯은 6천원. 점심과 새참두끼 등 세끼 식사를 제공받는다. 이들을 모아 팀을 구성해온「오야지」김씨는 한사람 몫 품삯을 더 받는다.
논두렁가에서 간단한 작업 지시를 받은 모내기 아줌마들은 곧바로 비닐백에서 모내기 장구(장구)를 꺼내 채비를 한다.
치마를 둘둘 말아 허리띠에 끼워 매고 긴 나일론 스타킹을 허벅지까지 올려 신고는 그 위에 반양말을 다시 신었다.
아랫도리 단속이 끝나자 이번엔 팔무장. 헌양말의 발바닥부분을 잘라내 만든 양말토시를 양팔에 착용한 뒤 오른쪽 다섯손가락에는 고무깍지를 낀다. 예전 못논에서 일꾼들을 괴롭히던 거머리는 농약 때문에 보기도 어려워졌으려니와 설령 있다해도 이같은 중무장 앞에선 영양실조(?)로 말라죽을 수밖에 없겠다.

<새참들밥은 옛말>
전남 장흥군 장흥면 건산리 들판, 13일 하오3시.
20여명의 아낙네들이 논두렁에 둘러앉아 자장면을 말고있다.
『세상 참 많이 변했지요.』
불과 10여분만에 새참이 끝난 뒤 그릇을 챙겨 오토바이에 싣던 읍내 중국음식점 덕성관 주인 이홍환씨(26)는『농촌도 이제 옛농촌이 아니라』고 했다. 이씨는 올해 들일에 자장면주문이 많을 때는 하루 1백여 그릇까지 받아 오토바이로 배달했단다.
세월따라 인심도, 풍속도 변한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솥을 가운데 놓고 날된장에 풋고추와 마늘을 찍어먹던 새참들밥은 비닐봉지로 포장된 빵과 라면, 중국음식점에서 시켜온 자장면으로 변해간다. 편리와 기능이 인정과 여유를 밀어낸 것이다.
베잠방이에 밀집모자를 쓴 품앗이 이웃이 새마을 모자에 청바지와 몸뻬를 입은「원·정일꾼」으로 바뀌고 길가던 나그네도 한사발쯤 걸치던「막걸리 인심」은 일꾼들의 머릿수대로 꼭 맞추어 갖고온 봉지우유와 요쿠르트 숫자에 빠듯하기만 하다.

<오토바이로 배달>
모내기 들판도 바야흐로「인스턴트 시대」-. 그와 함께 농촌의 서정과 낭만도 시들어간다.
『늙은 마누라 혼자 있으니 점심·새참해대기도 힘이 들고 차라리 돗내기(4∼5명이 한조가돼 모내기를 도급받는 것)를 주는기 편하다 아입니꺼.』
경북 영천군 북안면 반정3리 허연이씨(54)는 2천6백평 논의 모내기를 가까운 영천시내 「돗내기 일꾼」들에게 맡길 생각이라면서 새참조차 옛날 같을 수 없는 농촌의 변화를 절대적인 일손부족에서 찾았다.
이들 돗내기 일꾼들은 4∼5명이 한조가 돼 논한마지기 모심기에 얼마(영천군의 경우 쌀서말값·약4만2천원)로 도급을 맡기 때문에 주인은 식사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 이들 돗내기꾼들이 흔히 가까운 읍내 중국집에 간편한 자장면이나 우동을 새참·점심으로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
경북 안동군 풍산읍 현대식당주인 서미희씨(30)는 울해 이들 모내기일꾼들의 자장면새참주문이 밀려 모내기철에 하루 20∼30그릇씩 오토바이로 4∼5㎞ 떨어진 들판까지 배달했다고 했다.

<논두렁엔 카세트>
이같은 새참풍속의 변화는 물론 도급일꾼들만의 일도 일손 부족에서 만도 아니다.
전남 곡성군 석곡면 석곡리 심이구씨(50)는 집에서 농토까지가 십리길이 넘는다. 아침에 집을 나설때 심씨는 우유 3봉지와 라면 2봉지를 사고 석유버너를 챙겨 나선다.
반찬이 없는 식은 밥을 혼자서 먹을 때면 목이 메는 듯해 간단히 석유버너를 이용, 라면을 끓이는 것이 더 즐겁다는 것.
사람들의 입맛 자체도 변한 셈이다.
『사아아고옹에 뱃노래 가아무울 거이어리는-.』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들판-. 모내기가 한창인 들녘에 흘러간 옛노래 가락이 구성지다. 모심는 부녀자들이 논둑에 틀어놓은 대형 카세트 라디오가 울리는 뽕작조의 멜러디다.
『일함시로 노래라도 들어야제 뼛골빠지는 힘든 일을 무슨 재미로 한다요. 한번 논에 들어가면 한배미 다 심을 때까지 2∼3시간은 허리한번 못펴는디…』
잽싼 솜씨로 모심기를 계속하며 김옥이씨(47)는 노래가락을 따라 흥얼거렸다.
『얼럴럴 상사디야』그 옛날 들판에 울리던 일꾼들의 걸찍하고 흥겨운 풍년가 가락은 예향 호남의 들판에서조차 카세트의 소음에 밀리고 있다.

<품삯 8천원까지>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도회지로 떠나고 노인네들만 남아 조상의 전당을 지키는 농촌. 일손부족은 농촌노동을 전통적인 가족노동, 품앗이 마을공동노동에서 도시형의 날품계약노동으로 바꾸고 그에 따라 농촌사회의 정서와 윤기도 시들고 있다. 모심기 세시풍속의 변화도 그같은 노동형태 변화의 반영.
농산물가격은 물가를 따라 오르지 못하는데도 농촌의 인건비, 기타 영농비용은 해마다 올라 올해 농촌의 품삯은 읍·면지역이 하루 4천∼6천원, 도시근교 6천∼8천원선. 점심과 새참두끼를 주어야 하고 곳에 따라 아침·저녁까지 다섯끼를 제공하기도 한다. 거기다 남자는 고급담배(흔히 5백원짜리) 한갑씩. 『도시기업처럼 이것저것 다 따지면 한마지기 농사에 볏짚 서뭇 남는다는게 얼마전 농사였는데 이제는 볏짚도 못쓰는 통일벼에 그마저도 안남을 것』이라는 푸념.
이들 뒷바라지에 허리는 휘어지나 그래도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농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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