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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사극 영화 '왕의 남자' 광대역 감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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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감독은
몇 번의 결단을 내려야 할까.
영화 '왕의 남자'의
제작진은 "대략 1만5000번"
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배우들과 스태프의 의견
까지 감안하면 감독의
결단 횟수는 수만 번에 달한다.
그렇게 내린 결단과 결단의 고리를
이은 것이 한 편의 영화다.
'황산벌'에 이은 이준익 감독의
신작 '왕의 남자'는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인물과
인물을 잇는 결단의 순간들,
그런 고리의 힘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연극이다. 4년 전 연극판의 이름값하는 상패를 죄다 휩쓸었던 김태웅 연출의 연극 '이(爾)'에 영화의 탯줄이 닿아 있다. 그러나 '왕의 남자'는 감히 '수작'으로 꼽히는 원작에 도전한다. 영화의 주역인 광대 장생 역을 맡은 감우성(35.사진)을 14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그는 "'왕의 남자'의 적수는 '킹콩'도 '태풍'도 아니다. 다시 연극 무대에 올라가는 원작 '이(爾)'뿐이다"고 말했다. 실제 18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선 출연배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연극과 영화가 한 장소에서 연거푸 올라갔다. 진검 승부, 영화가 자신을 낳은 연극의 목전에 칼끝을 겨눈 셈이다.

'왕의 남자'에는 이토록 자신감이 넘친다. 출처는 어디일까. '왕의 남자'는 수십, 수백 겹의 문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구중궁궐' 같다. 감독은 문 앞에 선 관객들에게 한 번에 하나씩의 문만 열어젖힌다. 일단 발을 들여놓은 관객에겐 '선택권'이 없다. 연출은 간결하고, 템포는 매끄럽다. 감독이 열고 닫는 문을 따라 착착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궁궐의 핵심, 권력의 치부, 왕의 심장에 도달해 있다. 감독의 관객몰이는 그만큼 정교하다.

그래도 감우성에게 광대 역은 모험이었다. 처음 그는 캐스팅 제의를 받고 '노(No)'라며 거절했다. 사극은 처음인 데다 도박이었다. "아쉽지만 제 얼굴은 '사극형'이 아니거든요. 그런 도전이 무섭고 두려웠죠." 감독은 테스트를 제의했다. '일단 광대 복장을 하고 이미지를 보자'는 얘기였다. 그는 머리에 탈을 쓰고, 누더기 옷을 걸치고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곱상한 얼굴에 칼자국을 내고 싶더라고요. 그것도 사연이 있는 상처를 말이죠." 이미 그는 시나리오 속에 들어가 있었다. 머리에선 '노', 그러나 가슴은 '예스'라고 외쳤다.

그는 "목숨을 건 결정이었다"고 했다. 이기면 연기의 영토를 넓히고, 지면 낭떠러지로 몰릴 판이었다. 그는 줄타기는 물론 창(唱)과 꽹과리, 장구, 전통 춤까지 배웠다. 문제는 줄타기였다. 6개월을 꼬박 배워야 간신히 건넌다는 줄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달이었다. 감독은 "와이어도 있고, 카메라로 감쪽같이 잡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감우성은 싫었다. 대역을 쓰면 끝이란 생각이었다. "우리집 마당에다 줄을 맸어요. 잠자는 시간을 쪼개 줄에 올랐죠. 그래도 정말 두 번 할 건 못 돼요." 촬영장에서 그는 직접 줄을 탔다. 스태프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결국 줄 타는 대목에서 대역을 쓴 장면은 딱 두 군데뿐이었다.

'왕의 남자'에는 배우들의 그런 열정이 뚝뚝 묻어난다. 여장 남자인 광대 공길 역을 맡은 신인 이준기(23)의 알싸한 연기도 제맛이다. 잘록한 허리, 유려한 선, 붉은 입술을 버무린 여장 남자는 설핏설핏 '패왕별희'의 장궈룽(張國榮)과 '형사'의 강동원을 불러낸다.

감우성은 공을 감독에게 돌렸다. "이준익 감독을 처음 봤을 땐 신뢰가 안 갔어요. 일본 순사처럼 생겼잖아요. 그런데 현장에서 내공이 상당하다는 걸 깨달았죠."

이 감독은 배우와 스태프의 능력을 100% 뽑아 먹을 줄 안다고 했다. "이런 식이에요. 감독님 스스로 부족한 듯이 보여 배우와 스태프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끌어내요.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라면서 말이죠. 대신 함량미달의 아이디어에 대해선 철저한 논리와 충분한 설명으로 상대를 납득시킵니다. 그러고선 '미안해, 대신 내가 술 살께'라고 툭 던지죠." 역시 감독과 배우, 스태프의 전력투구로 빚은 그릇은 때깔부터 다르다.

글=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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