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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경제의 또 하나의 얼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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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른바 향락산업에 대한 시비가 무슨 유행처럼 급작스레 번지고 있다. 지나친 사치풍조와 불건전소비풍토에 대한 때늦은 반성에서다.
원색적인 고발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산업」이란 칭호까지 붙여졌듯 싫든 좋든 이미 우리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해버렸다.
적어도 경제 쪽에서 본다면 향락산업은 오늘의 번창을 누릴만한 충분한 원인과 근거가 있었다. 최근 몇 년간 경제의 「피」라 할 수 있는 돈의 흐름이 그쪽으로 완연히 기울어 왔었고 정부정책 또한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보다는 방관적 입장을 취해왔었다.
작년 4월 한달 동안의 건축허가 면적은 1백35만평으로 사상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증가율로는 전년 동월에 비해 무려 83·7%나 늘어났었다. 경제기획원은 당시 월간경제동향보고를 통해 『이것보라』는 듯 자신 있게 탈 불황을 선언했었다. 경기회복과 투자활동의 가장 민감한 선행지표인 건축허가면적이 이처럼 크게 늘고있으며 불황탈출은 이제 틀림없다는 해석이었다.
그것이 불황탈출의 예고가 아니라 당시 한참 불붙기 시작한 부동산투기의 실증이오, 향락산업의 현장인 여관·사우나·안마시술소·고급갈빗집 등의 번창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정부스스로도 귀를 막았었다.
원인은 좀더 거슬러 올라가야 찾아진다. 향락산업이라는 것이 극심한 불황 속에서 번창하기 시작했듯 그것의 모태는 근본적으로 불황 속의 왜곡된 경제질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뭘 해도 밑지는 마당에 새롭게 찾아진 「고수익성 신업종」이었던 셈이다.
거기다가 사채시장을 중심으로 지하경제에 대한 물리적인 응징은 돈의 기존흐름에 급작스런 단절과 경화현상을 초래했다. 멀쩡한 기업인들이 『골치 썩이며 뭣하러 사업하느냐』며 대낮부터 골프장이나 사우나탕을 찾는 풍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분기점은 82년 초의 이·장 사채사건과 연이어진 6·28금리인하조치, 7·3실명제 실시 발표였다. 사채파동의 후유증으로 지하경제는 더욱 혐오스런 존재로 몰아붙여졌고 정부는 결국 모든 금융자산에 대한 실명제실시라는 과격처방을 들고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가뜩이나 은행에서 아무리 돈을 풀어도 기업투자에 연결되지 않는 이상현상을 계속하던 판에 이처럼 철퇴가 가해지자 금융시장은 단숨에 꽁꽁 얼어붙었다.
지하금융에 대한 단속은 금융시장을 떠나 보다 안전한 은신처를 찾았고 귀착점은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부동산 쪽이었다.
저금리체제 속에서 뭉칫돈을 풀어댄 것도 실명제를 도와 이 같은 현상을 가속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통계숫자를 봐도 건축허가면적이 급격히 늘어나는 시점은 82년 중반인 실명제 발표이후부터였다. 50∼1백%사이의 폭발적인 증가율을 계속했다.
지난 78년의 부동산투기가 재현됐고 기업들도 앞을 다투어 빌딩을 지어댔다.
정부의 여려 차례 엄포에도 불구하고 계속 뭉칫돈이 부동산 쪽으로 몰렸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식이었다. 재현된 부동산투기는 역시 『땅 사는 것이 제일 현명한 투자임』을 이내 확인시켰다.
이처럼 최근에 일어났던 부동산투기의 특징은 지하경제단속에 대한 「은신처 역할」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강남의 널찍널찍한 호화갈빗집이나 여관·사우나빌딩 등도 그 원류를 따지고 보면 부동산투기에서 비롯된 부산물인 것이다.
소위 공급측면에서 본다면 있는 땅을 놀리느니 고수익 사업을 찾아서 너도나도 시작한 것이 지금의 번창한 향락산업을 누리게된 동기였다.
결국 부동산투기나 향락산업의 번창은 그 동안의 경기회복과정에서 빚어진 필연적인 귀결이다.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일처럼 야단법석이지만 충분히 예견되던 일이었다.
물론 우리경제가 소위 2천 달러 소득시대에 다다른 만큼 레저수요나 소비욕구가 크게 늘
어 날 때라는 지적도 감안해야한다. 또 향락산업이라는 것의 규모가 전체 GNP에 비해 얼마나 된다고 이 난리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과소비의 도를 넘어 소비풍조자체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향락일변도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윤리적인 가치관의 문제는 따로 하더라도 이러다간 경제적으로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소비를 늘려 불황탈출에 성공, 예상 밖의 고성장 궤도에 다시 올라섰으나 이젠 그것이 지나쳐 지속적인 성장의 잠재력과 근본을 갉아먹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도 안정된 물가를 자랑하게됐고 정부의 정책 역시 성장위주의 구태를 버리고 안정기조를 정착시키겠다고 강조 해온 마당에 현실의 여러 모퉁이에서는 극단적인 소비풍조가 만연되는 모순이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 빚을 갚고 자력성장을 하자는 것이 안정화정책의 핵심일진대 현실은 정반대의 현상이 계속되고 있으니 문제다.
정부목표대로 더 이상 외채를 늘리지 않고 자력성장을 실현하려면 지금의 저축(가계저축률)을 2배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가계저축률이 일본은 14%, 대만은 12%선인데 한국은7%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만큼 허리띠를 졸라매고 절약해야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처럼 만연된 소비풍조 속에서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향락산업에 대한 우려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도덕경제를 추구하자는 것이 아니라 금연의 결단을 내려야할 허약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쾌락을 위해 대마초를 피우고 히로뽕주사나 맞으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격이다.
우리경제의 한구석이나마 이 같은 마약중독현상이 번지고 있다는데 대한 걱정인 것이다. <이장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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