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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0><제 80화>한일회담(22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박대통령은 주일대사 기용 발표직 후 나를 청와대로 불러 한일관계 정상화에 관한 소신을 피력하고 현안 타결에 맹진해줄 것을 당부했다.
『우리 국내의 정세로 봐서 내년 6월 중순까지는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룩되어야 합니다. 국내의 반대 움직임도 그에 따라 한층 격화될 것으로 전망되나 현안의 조기타결이 정부의 확고한 기본방침이오.』
매서운 눈초리에 강인한 의지가 실린 음성에는 힘이 절로 느껴져 왔다.
『김대사는 과거 외무부에서 오랫동안 일한 전문가인만큼 기대를 걸고 있소. 내가 김대사를 전폭적으로 신임해 전권을 맡길터이니 앞으로 반년 안에 해결되도록 전력을 다해 주시오』
나는 『오랫동안 재야에 있던 저에게 막중한 사명을 부여해 주신 각하께 최선이 노력을 다해 보답할 각오』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는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와 간곡한 당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서 몇가지 선행조건을 응낙받아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미리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복안을 꺼냈다.
『각하, 현안의 조기타결을 위해 제가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 선행조건을 들어 주셔야겠습니다.
첫째 각하께서 이미 저에게 전권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지만 교섭의 보고 및 정훈 방법을 저에게 완전히 일임해 주셨으면 합니다.
중대한 외교교섭에서 외무장관에게 전보나 문서로 청훈하면 실무자들은 구두점 하나를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 야단을 치고 시일을 끄는 것이 비일비재하므로 각하께 직접 보고하고 정훈토록 허락해 주십시오.
물론 외무장관이나 총리와는 적절한 협의를 하겠습니다만, 실무자급의 통제를 받는 체제가 되어서는 곤란하겠습니다.
또 중대사안이 발생했을 때는 전보나 전화를 통한 보고보다 동경과 서울이 왕복 한나절의 거리이니 제가 판단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귀국해 바로 각하를 비롯한 정부 고위당국자와 협의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십시오.
둘째, 회담 대표단 구성에 정치적 배경을 떠난 순수한 관료 회신으로 채워달라는 것입니다.
과거 대표단에 정계인사·재야인사·법률가 등이 많이 참가했는데, 그들은 회담 추진 때 국내 정치상황이나 여론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여 회담의 실질적 성과를 가져올 수가 없게됩니다.
또 이왕 저를 대사로 임명하신 만큼 수석대표도 정하도록 해주십시오.
과거 6차례 의당에서 3차례는 거물급 정계인사가 맡았기 때문에 일본측도 저의 대사기용 발표후 제가 수석대표를 맡는지 여부에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내년 6월까지 한일 현안을 마무리 짓는다는 정치적 결론을 내린 시점인만큼 대표단은 국내 정치상황을 고려치 않고 전력을 다해 추진할 순수관료들로 구성돼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언드릴 사항은 활동비를 충분히 주셔야겠습니다.
종래 우리는 늘 일본측의 초대를 받아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많은 빚을 져온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도 일본 정객·관료·언론인들을 초대해 대접하면서 대등한 교제를 하고 막후 로비도 활성화 할 필요성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박대통령이 활동비는 어느정도 필요하냐고 물어 내가 달마다 1백엔은 되어야겠다고 대답하자 배석한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한은 동경지점에 달마다 1백만엔을 김대사에게 지급토록 지시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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