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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은 각이 3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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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대 아테네에서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가 진리에 관해 열띤 논쟁을 벌인이래 『진리는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철학의 중심과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진리를 탐구하는것이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던진 질문도 『진리란 무엇인가?』였고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상식인들도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있는 것이다. 사실 진리의 추구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과제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한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진리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수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믿는것은 모두 진리라고 주장하기 전에 어떠한 근거로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는지 먼저 자기자신에게 묻지않으면 안된다.
자기 자신을 설득시킬 근거를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 것인가.
철학자들이 막연히 자기 주장을 고집하기전에 먼저 진리의 기준을 설정해 보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몇가지 대표적인 입장들을 살펴보자.
철학자들간에 가장 오래 통용되어 왔고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수 있는 이론은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할때 그것이 사실과 서로 대응하고 있으면 진리라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만약 눈이 희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눈이 희다』 라는 판단은 진리가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입장은 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이고 철학사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공식적인 입장이 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다』라고 했을때 그는 이러한 기준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며 중세의 철학자들도 『사물과 지성이 일치하는 것』 이 진리라고 주장하여 그것을 주장하고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어떤 판단을 사실과 비교하여 서로 대응하는지를 검토해 봄으로써 진리가 확인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판단을 과연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비교할 수 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있다. 예를들어 우리가 『눈이희다』는 판단을할때 실제로 우리가 비교한것은 눈이 희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또하나의 판단과 비교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삼각형은 각이 세개다』라는 판단은 여러삼각형을 비교한 다음에 얻는 지식이 아니라 「삼각형」이란 말의 뜻이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가.
이러한 점들을 지적하며 「브래둘리」(F·H·Bradley)는 어떤 판단과 진정한 의미의 사실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실제로 우리가하고 있는 것은 틀릴수도 있는 여러판단들을 서로 비교하는데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소위 정합설은 이러한 비판을 근거로해서 나온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진리의 기준은 하나의 판단이 다른 여러 판단들과 정합 혹은 일맥상통하는데가 있는지의 여부에 있다고 말한다. 예를들어 우리도 「퍼즐」이라는 게임에서 볼수있듯이 여러개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풍경화를 상상할수있다. 이 풍경화를 어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의 체계라고 할때 조각들 하나 하나는 그 사람이 시시각각으로 내리는 판단들이 된다. 여기서 하나의 판단이 다른 판단들과 이가 맞을때 그것은 진리가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입장은 사실과의 일치만을 주장하는 이론을 많이 보충해준다. 특히 수학이나 과학에서 진리를 말할때는 사실과의 비교를 전제로 하지 않기때문에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예를들어 「1+2=3」이라는 판단은 그것이 사실과 반드시 대응한다기 보다는 다른 판단, 이를테면 「l+3=4」와 모순되지 않으므로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입장에도 여러가지 약점이 있다.
「러셀」(B.Russell)이 지적하는 바와같이 『정합적인 세계가 하나뿐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만일 여러개라면 하나의 절대적인 체계속에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엇물려있는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사실과의 일치를 전제로 하지않는 진리를 무엇에 쓸것인가. 더구나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판단들이 서로 모순되지않아야 한다고 말하나 이러한 판단 자체의 진리는 무엇에 의해 정당화 될수 있는가.
이와같이 진리의 기준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논란은 결국 절대적인 진리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한 「프로타고라스」의 망령을 되살아나게 한다. 그 현대적 표현을 우리는 「게임즈」(W.James)의 실용설에서 찾을수 있는데, 그에의하면 진리의 기준은 판단 그자체에서 찾을것이 아니라 판단이 가져오는 실제적 귀결, 즉 판단의 성과에서 찾아야 된다고 한다. 예를들어 『눈이 희다』라는 판단이 진리인지 알려면 눈덮인 광야에 흰 옷을입은 특공대를 파견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서 돌아왔는지 보면 알수 있다는것이다.
만약 눈이 검다면 대부분의 병사들이 희생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판단은 쓸모가 없기때문에 진리가 될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이 한낱 생활의 방편에 불과하며 진리는 실용적 가치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입장을 대면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사람들일지라도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별로 쓸모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을때 당황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유용한 것인지는 진리만큼이나 알아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판단이 『유용하기 때문에 진리』 인지 『진리이기 때문에 유용』 한지를 물어보아야한다. 요컨대 실용설은 강자의 독단이나 약자의 변명에도 얼마든지 이용될수 있는 이론인것이다.
이처럼 오로지 진리만을 추구한다는 철학자들도 그 기준에 관해서 조차 합의를 보지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진리앞에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들인가를 말해준다.
동시에 그것은 진리를 고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일인가를 보여준다. 급진적이고 독단적인 사람일수록 상대는 커녕 자기 자신조차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는 경각심도 일깨워 준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자기성찰과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만 진리의 편린이나마 엿볼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한다는것이 단순히 이론상의 문제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좌표를 마련하고 바람직한 삶을 이끌어 가는데 도움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할때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은 더욱 절박한 문제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좀처럼 진리를 터득할수 없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있는 신념이나 견해를 절대적인 진리로 착각하고 이것을 일반화하여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수있다는 사실에 있다.
진리의 추구가 이러한 형태로 나타나면 그것은 마침내 이념(Ideology) 의 양상을 띠어 하나의 신념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집단을 이루고 이 집단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배척하기까지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이 특히 경계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독단적인 태도다.
우리에게는 물론 진리가 가장 소중한 가치이지만 그보다는 진리에 임하는 태도가 더욱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항상 겸허한 사람에게만 그 모습의 일부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줄아는 사람에 의해서만 비로소 체험될 수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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