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5) 제80화 한일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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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3사태로 내각붕괴…정일권씨 새총리로
한일 양국은 64년7윌 다같이 외무장관을 바꿔 한일회담의 초기타결에 대한 양국 수뇌의 확고한 결의를 표시했다.
학생들과 야당측의 결사적인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은 급기야 재3공화국의 최두선 초대내각은 불과 6개월의 단명으로 끝나게 만들고 정일권총리을 수반으로한 이른바 돌수내각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한일회담을 타결할 외무장관을 찾지못해 두달 이상을 정총리가 경임토록 해야했다. 6· 3사태라는 비극적 상황이 말하듯 당시 국내정정은 대일굴욕외교 반대함성이 진동했다.
김종비공화당의장이 체일중 박대통령의 소환령을 받고 급기야는 귀국해 직접 대학가를 돌며 맹렬한 설득작업에 나섰지만 야당측의 반대선동이 그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김종비씨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국내외의 강경파 청년학생들을 직접 만나 설득해 놓으면 국외군들의 선동과 모함으로 결국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형편이었어요.
체일중 조총련계 청년들이 숙소에까지 몰려와 「한일회담 결사반대」 「굴욕외교 집어치우고 당장 귀국하라」 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소란을 피웠다.
그때 나는 측근들의 만류도 물리치고 그들에게 「할말이 있으면 대표 몇몇을 들여보내라」고 했지요. 몇명이 호기차게 들어오길래 나는 차근차근 한일회담을 빨리 매듭지어야 하며, 「굴욕」 「굴욕」 하는데 무엇이 굴욕이냐며 전후 사정을 다 설명했지요.
그들은 내 설명을 듣고는 모두 수긍해 조용히 물러갔지만 밖에 있던 대다수가 그들 대표들을 「사꾸라」 로 몰아버려 만사가 무위로 돌아갑디다.
귀국해서 각 대학을 돌며 학생들에게 그 당위성과 교섭경위를 설명하고 설득하니까 학생들도 상당히 이해를 깊이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야당지도자들이 배후에서 정치적으로 움직이니까 그에 영향을 받아 한층 격렬한 데모가 일어나 나중에는 정권 전복까지 노리는 상황으로 치달아 결국 6·3 비상계엄령 선포라는 파국을 맞이하게 됐지요 이같은 형편이었으므로 박대통령도 외무장관감을 물색하기가 여간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엇다. 박대통령이 정총리로 하여금 교섭케했던 양유찬 전주미대사등 몇 명의 유력한 입수를 고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한일회담을 타결하는 의무장관은 누군들 「제2의 이완용」으로 사갈시하려 하는 당시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영예로운 외무장관직이지만 사양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자천타천의 인물도 없지 않았으나 이 경우에는 박대통령의 눈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한일 정상화문제라면 내가 맡아야한다』고 제3자를 통해 자천한 인사를 외무장관직에 앉혀도 봤지만 전국적인 반대운동이 고조되자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일본의 「시나이」 외상에 걸맞는 경륜있는 인사에 대한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새 외무장관은 국내 정세를 고려하지않고 오직 한일관계 정상화만을 위해 돌진할 수 있는 추진력 강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듣고 있다.
이즈음 이동원주태대사가 본부와는 한마디도 상의 없이 귀국해 반도호텔에 여장을 풀어 언론은 그가 외무장관을 노려 의전 상의절차도 무시하고 귀국했다고 비판해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씨는 『6월말 어느날 급히 귀국하라는 청와대의 훈령을 받고 귀국했을뿐』 이라며 『청와대의 극비 훈련을 어떻게 본부와 상의한 후 따르겠느냐』 고 최근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뭏든 박대통령은 군정중 청와대 비서실장을 했던 이대사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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