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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민주주의의 적은 독재가 아닌 돈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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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013년 6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행진을 하고 있다. 무르시가 군부에 의해 축출되면서 이집트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중앙포토]

정치는 어떻게 속이는가
피터 스와이저 지음
이숙현 옮김, 글항아리
283쪽, 1만5000원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조슈아 컬랜칙 지음
노정태 옮김, 들녘
416쪽, 2만원

이 두 책이 외치고 있는 말을 요약하면 이럴 것이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장기독재만이 아니다. 부패와 거짓말, 그리고 외교적 편협함도 민주주의의 적이다.”

 『정치는 어떻게 속이는가』는 미국의 금전정치에 대한 탐사보도 비슷하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책장을 열지 않는 게 좋겠다. 내용이 적나라하고 충격적이다. 우리는 흔히 ‘돈이 정치를 부패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해 당사자가 돈으로 정치인을 매수해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적 결정이나 입법 활동을 유도한다는 뜻이다. 이는 부패와 정치 왜곡의 원인으로 지목돼왔다. 이를 해결해야 공정하고 깨끗한 민주사회를 만들 수 있다며 금전거래를 원천적으로 막는 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미국 보수 성향 연구기관인 정부책임연구소 소장이자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원인 지은이는 한술 더 뜬다. 오히려 ‘정치가 돈을 더럽히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노동단체로부터 대기업까지 외부 이해관계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과 법안을 만들기 위해 후원자라는 이름으로 먼저 정치인에게 접근한다. 이들은 후원금이라는 명목으로 정치인을 돈으로 유혹한다. 그 결과 왜곡된 정책으로 정부 진로를 뒤흔든다. 이들이 유리해지는 만큼 유권자이자 납세자인 국민은 불리해진다. 워싱턴에서는 이를 ‘합법화된 뇌물’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권력을 계속 누리고 싶은 정치인의 욕망이다. 정치집단은 이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100년도 더 전에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재임 1897~1901)의 모금 담당자인 마크 해나는 명언을 남겼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돈이고, 둘째는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인은 표로 얻은 권력을 돈으로 바꾸는 ‘환금병법’을 개발했다. 온갖 창의적인 모금 방법 말이다. 돈은 입법가의 눈을 흐리게 한다. 물론 이를 제한하려는 도덕적 시도도 있었다. 갈취에 지친 세력이 나섰다. 하지만, 금전정치는 도도한 탁류이자 베고 또 베도 새로 돋는 독초다. 의회 권력이 기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심지어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한 금전정치 근절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지역구에서 선출된 의원들은 지역구민의 이익이 아닌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데 시간과 정열을 쏟는 게 일상적이 됐다. 의원들의 생명줄은 지역구에 대한 봉사나 대화정치의 활성화가 아닌 돈에 있기 때문이다. 50년간 의회에 시달렸다는 아파치 주식회사의 레이 플랭크 회장은 “문제를 해결해서 생기는 돈은 없다. 그러니 왜 의원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겠나”라며 일침을 놓는다. 이러니 의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요즘 유행처럼 논의되는 ‘대의정치의 한계’라는 의제도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이런 식으로 워싱턴 금전정치의 내막을 샅샅이 파헤친다. 한국 정치는 미국 정치에 비해 얼마나 금전에서 자유로운가?

 미국외교협회 연구원이 쓴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는 전세계적으로 위협받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파헤친 책이다. 흔히 경제가 발전하고 중산층이 두터워지면 민주화 욕구가 강해져 정치적 개혁으로 이어진다는 게 기존의 믿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이렇게 도식적으로 변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개혁과 시장경제 발전이 ‘손에 손잡고’ 함께 나가지 못하고 서로 삐걱거리고 있다.

 가까운 태국에서는 끝없는 정쟁과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빈사 상태다. 선거로 집권한 정당이 시위대나 군인에 의해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다. 한때 동남아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다른 개발도상국에 민주주의의 모범국가로 여겨졌던 나라의 현실이다. 실제로 21세기 초만 해도 ‘멸종 위기’에 있었던 쿠데타는 2006년 이후 다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2000년에서 2006년 사이 기니·온두라스·모리타니·니제르·기니비사우·방글라데시·태국·피지·마다가스카르 등에서 쿠데타 세력이 권력을 ‘하이재킹’했다. ‘아랍의 봄’으로 독재자를 몰아낸 자랑스러운 이집트 시위대는 군부 쿠데타로 순식간에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다. 독재 세력의 역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의 거짓말은 일상이 됐다. 과연 권위주의는 이런 식으로 되살아나는가?

 지은이는 이 같은 글로벌 현상이 편협함을 포함한 미국 외교의 실패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앞으로 어느 나라든 군부와 손을 끊고, 부패와 전쟁을 벌이며, 선거 승자를 존중하라는 등 다양한 충고를 쏟아낸다. 미국은 이미 이들을 좌우할 수 없으므로 국제다자기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신흥강국을 끌어들여 힘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국제문제에 더욱 겸허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세계는 이미 미국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트레이드 마크인 민주주의의 확산을 포함해서 말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S BOX] 뇌물과 갈취의 차이

『정치는 어떻게 속이는가』에는 민감함을 넘어 과감한 내용이 줄을 잇는다. 지은이는 금전정치의 본질을 파헤치면서 고정관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정치인과 경제인 사이에서 오가는 돈이 ‘뇌물이 아니라 갈취금’이라는 것이다. 지나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증언을 들어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로버트 허볼드 전 마이크로소프트 최고운영책임자(COO)는 “협조하지 않으면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는 말을 (정치인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세계 최고 기업의 경영인도 정치인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존재가 되곤 한다.

 아파치 주식회사의 창업자로 회장을 지낸 레이 플랭크는 자신의 기업이 “50년간 (민주·공화의) 양당에 시달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거자금을 내고 (의회를 상대로 하는) 로비회사와 계약하는 것을 ‘보호비’라고 표현했다. 이는 마피아로부터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 정도면 정치가 ‘막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의원들의 고백도 생생하다. 러스 파인골드 전 상원의원은 “사업가들이 정치인을 불러놓고 ‘내가 돈을 줘도 되느냐’고 비는 게 아니다”라며 “정반대로 사업가들이 정치인이나 그 대리인, 대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부터 끊임없이 호출을 당한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거물 전직 정치인이 육성으로 밝히는 “뇌물이라기보다 갈취에 가깝다”는 고백이 섬뜩하다. 지은이는 “미국의 정치는 돈과 특혜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수익사업이자 산업이 됐다”고 한탄한다. 그 한탄이 남의 나라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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