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40. 5회 아시안게임<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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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난장판이 돼버린 농구경기장. 한국과 태국 선수들이 뒤엉켜 몸싸움을 하고 있다.

1966년 12월 17일 오후 8시30분, 방콕아시안게임 종합경기장 제1체육관. 한국과 태국의 남자농구 준결승전이 열렸다. 한국은 B조 1위, 태국은 A조 2위. 우리는 조별 리그에서 난적 중의 난적인 이스라엘을 62-48로, 숙적 필리핀을 83-82로 물리쳤다. 당시 우리 선수들의 경기력은 절정이었다. 태국은 우리의 상대가 안 됐다. 또 다른 준결승은 일본과 이스라엘의 경기. 어느 쪽이 올라와도 자신있었다. 금메달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태국 선수와 관중이 농구를 격투기로 둔갑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관중은 우리 선수들이 경기장에 나타나자마자 야유부터 보냈다. 태국 선수들의 경기 태도는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선수가 슛을 하려고 하면 손으로 얼굴을 후려칠 기세였고 골대 밑에서는 킥복싱 선수처럼 팔꿈치로 때렸다. 그러나 심판은 여간해서 태국 선수들의 반칙을 지적하지 않았다. 한국 선수들은 제대로 경기를 할 수가 없었다. 전반 27-38, 후반 15분30초쯤엔 52-67로 뒤졌다. 경기를 뒤집고 결승에 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이때 일이 터졌다.

태국 골밑에서 리바운드를 잡아낸 한국의 김철갑 선수가 코트에 나뒹굴었다. 다시 점프해 슛하려는 순간 태국의 체푸에삭이 얼굴을 때린 것이다. 김 선수는 급소에 결정타를 맞은 권투 선수처럼 푹 쓰러졌다. 이가 두 개나 부러졌다. 이 꼴을 보고 한국 선수들이 참겠는가. 이병국 선수가 달려들어 체푸에삭을 후려쳤다. 그러자 태국의 광산이 투창에서 쓰는 창만큼이나 긴 막대기를 가져와 우리 선수를 향해 마구 휘둘러댔다. 여기에 맞아 이 선수의 팔목이 6㎝나 찢어졌다.

관중석에서 응원하던 여자배구의 김군자 선수가 달려 내려가 태국 선수의 막대기에 매달리며 싸움을 말렸다. 분별없는 태국 선수들은 김 선수까지 두들겼다. 이 와중에 태국 관중이 코트에 뛰어들어 우리 선수를 둘러싸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권투 심판 주상점씨가 달려나가 경찰에게 수습을 요청했다. 그러나 경찰은 주씨에게 몽둥이질을 했다.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병희 농구협회장과 손기정 단장도 뭇매를 맞을 지경이었다. 태국 경찰관이 손기정 단장의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아수라장에서 냉정을 지킨 사람은 딱 한 명, 우리팀의 미국인 코치 찰스 마콘뿐이었다. 그는 본부석의 경기 감독관에게 코트에 난입한 관중을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그의 요구는 묵살됐다. 그러자 마콘 코치는 경기 포기를 선언했다. 우리 선수들은 나중에 출동한 경찰관들에게 둘러싸여 경기장을 떠났다. 나는 마콘 코치의 판단이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분위기는 경기를 다시 하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 선수단의 안전이 걱정될 정도였으므로.

다음날 아침 아시아농구연맹(ABC)은 농구 경기에 출전한 11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전날의 불상사에 대해 논의했다. 우리는 재경기를 요구했지만 ABC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한국과 태국을 뺀 9개국 대표의 투표로 결정해야 했다. 결과는 뻔했다. 경기가 중단된 시점의 스코어로 승부를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이 결정을 받아들였고 3~4위전에서 일본을 72-60으로 이겨 동메달을 땄다. 예선에서 우리에게 완패한 이스라엘이 금메달을 가져갔다.

이 사건은 방콕아시안게임의 가장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그것은 최악의 '관중 난동'으로서 아시안게임의 역사에 오점으로 기록됐다. 나는 이 일의 책임은 개최국에 있다고 생각했다. 태국에 대한 나의 인상은 한동안 좋지 못했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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