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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것」만 좇는 어린이의 꿈에 두려움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며칠전 신문은 우리나라 아동들이 선망하는 직업이 과학자 의사 등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국민학교 아동의 포부는 성장함에 따라 수차례 바뀌는 것이지만 나는 이 보도에 적잖은 놀라움과 서글픔을 느꼈다.
첫째는 사람의 포부가 그의 성공정도에 정비례하며 확대되게 마련인데 어째서 우리아동은 이토록 아득하고 높으나 높은 동일시 모델을 갖게 되었는지 아동이라는 현 위치와 높고도 먼 포부 수준간의 거리 때문에 허황된 포부정도로 그쳐버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아동의 세계는 좁기 때문에 그의 좁은 관심세계에서 동일시 모델을 찾아 포부수준을 정하고 그 수준에 이르면 좀더 높은 기대로 점진적으로 성장되어야 제대로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닐까. 외국 아동들은 교통순경, 선생님, 간호원, 인형가게나 피자가게 주인등을 선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비하면 우리아동들의 꿈은 너무 허황된 느낌도 준다. 아동에겐 뭘하는지 잘 모르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통학길에 매일 돌봐주는 제복입은 교통순경이 더 고맙고 멋져보이게 마련인데….
둘째의 유감은 이들 직업이 모두 외적·물리적인 것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이 많은 아동들이 다 과학자가 된다면 누가 마음의 양식. 마음의 병을 위한 교사·예술가·시민 봉사자가 될 것인가? 어째서 매일 공부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하지 않는가? 과학자나 의사도 못되는 선생님으로부터 그 무엇을 배우고 감화받을 것인가?
몇년전 교련이 조사한 교사의 사회적 지위는 가수나 간호원보다 못한 24위였다. 이 사실에 놀라 교권확립의 해가 정해진 적도 있었지만 지금의 교권은 그때보다도 더 추락된 느낌이다. 이점은 자기 선생님처럼 되고싶다는 아동이 없는 학급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자기학교 교수를 사기꾼이라는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만이 절감하는 현실은 아니다.
비록 그 책임의 일부가 선생님에게 있다해도 이런 현실은 학생들을 위해 지극히 불행한 사실이기 때문에 사회모두가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 자녀들이 경멸하는 선생으로부터 무엇을 배울수 있겠는가? 배울 것이 없으므로 학교에 보내지 말아야 할것이 아닌가.
오늘의 졸업생에겐 모교가없다. 모교가 모교의 구실을 하려면 건물이 옛모습을 지녀야 할 것이 아니라, 낯익은 스승이 있어야 한다. 스승이란 신명날때가 아니라 불행스러울때 떠오르는 부모이상의 존재다
그래서 사업에 실패한 중년신사가 불현듯 옛 국민학교를 찾아가 백발의 스승과 막소주잔을 기울이고나면 왠지 상처가 부드러워지는듯 느껴지는 일생의 구심점과 같은 모교의 구실을 해주게 된다.
아무리 옛 터에 옛 건물이 그대로 있다해도 낯익은 스승이 없으면 타관이오, 불청객처럼 느껴지는 것은 곧 스승이 모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승은 곧 학교의 주인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그 어떤 학교에도 주인은 있는가? 사회의 푸대접과 그 무슨 사유들로 우리에겐 모교가 되어주는 옛 선생님이 안계신다.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주인이어야할 교수는 재임명으로 사실상 나그네요, 학생들도 때가 되면 졸업하니 역시 손님이다 굳이 주인을 찾자면 사무직원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마도 현대인들의 춥고 외로운 떠돌이병, 나그네의식은 생의 구심점이 될 모교가 없고, 모교를 지키는 스승이 없기 때문일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승도 없어지고 만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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