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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넓은 집, 더 편한 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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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라는 가난한데 국민은 부유한 것 같다(국궁민부).』 한 중공학자가 한국을 평하여 한 말이다. 중공의 당면과제를 「국부민궁」의 모순을 극복하여 「국부민부」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곁들여 나온 평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어 적어본다.
확실히 우리나라는 나라 전체로 보아 아직 가난하다. 가진 자원도 별것 없고 땅도 좁고 산업화의 정도도 이제 개발도상국을 막 벗어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동안 쌓아놓은 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빚이 쌓여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부 국민들은 잘 살고 있다. 먹고 입고 자는데 있어서, 그리고 노는데 있어서 선진국 어느 나라 국민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외국인이 피상적인 관찰로 국궁민부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이런 현상을 빚게되었는가 하는 경제발전정책의 잘잘못을 가리자는 뜻은 없다. 그것은 경제전문가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 관련된 우리 국민들의 의식에 관하여만 이야기를 좁혀 보겠다.
「국궁민부」현상은 한마디로 몸담고 있는 나라와 사회가, 그리고 이웃이 가난하든 말든 개의하지 않고 나만 편히 잘 지내면 된다는 극히 개인적인 생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남과, 그리고 모두를 즉, 「공」을 생각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삼가야할 일들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가진 자는 왜 자기가 남보다 더한 부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사회에 더 큰 공헌을 했고 또 앞으로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남보다 더 넓은 집, 더 편한 차를 태워준다는 사실을 한번쫌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행동한다면 필요 이상의 사치는 스스로 삼갈 것이다. 만원버스와 지하철에 시달리는 이웃을 보면서 외제고급승용차를 꼭 타야겠는가? 세끼 식사가 어려운 동포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외국산 고급양주를 하룻저녁에 서민 한달 생활비만큼씩 뿌리면서 마실 수 있겠는가? 단칸방도 없는 수많은 친지를 외면하고 분에 넘치는 호화저택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공공의식이 모자라는 점은 꼭 가진 자중에서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없는 사람 중에서도 많다. 공중전화를 부숴서 나라의 부를 축내고, 쓰레기를 마구 버려 세금을 쓸데없이 더 쓰게 하고, 법질서를 어겨 공연히 나라의 경찰력을 더 쓰게 하여 나라를 가난하게 하는 일은 가진 자, 가지지 않은 자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는 일들이다.
국민들이 생각을 고쳐 나라에 피해를 안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라를 부하게 하고 나도 부하게 되는 길이라고 믿고 행하여만 준다면 아마도 우리가 선진국이 되는 기간은 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자기의 부를 해치는 자해행위의 손실을 합치면 얼마쯤 될까? 아마 한해에 수천억원쯤은 될 것이다.
대만과 일본정부는 「수입자유화」의 폭을 넓혀도 자국산업에 큰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사치스러운 소비품을 수입자유화해 주어도 국민들이 스스로 안 사주기 때문이다. 국산으로 족한데 굳이 외제를 쑬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들을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밀수까지 해다 외제를 쓰는 판인데 문을 열어놓으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가 우리의 발전을 스스로 더디게 한다.
일전에 서울대공원을 개원한날 밀어닥친 관람객들이 부숴 놓은 공원기물과 흩어 놓은 쓰레기들에 대한 보도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걱정을 했었다. 이런 수준의 공공의식을 가진 국민들을 바탕으로 어떻게 「책임 있는 시민」을 전제로 한 민주주의를 해 나갈 수 있을까고 걱정하는 「극단적인 염려파」까지 있었다. 그러나 교황을 모시고 행한 천주교도들의 여의도 시성식과,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보고 나서는 반대로 밝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좋아들 했다.
1백만명의 인파가 질서를 자율로 지키고 쓰레기하나 남기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이 이제 어느 앞선 나라 국민 못지 않은 질서의식과 공공의식을 가졌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왜 같은 한국국민들인데 1주일 간격으로 같은 서울에서 모인 1백만명의 인파들이 이렇듯 차이가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는가? 처음부터 전혀 다른 「군중」들인가? 아니다. 바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고 없고에서 생긴 차이다. 바로 이끌어주면 질서도 지키고 남을 위해 봉사도 하고 착한 일만 골라하는 국민들이 잘못 이끌리면 엉망의 무질서를 빚어내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바로 가리고 스스로 바른 길을 걷는 뚜렷한 지도자들이 계속 바른길을 일러주는 집단과 사회에서는 염치없는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어렵다. 분위기 자체가 바른 기운을 풍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마구 해도 좋은 해이한 분위기 속에서만 허튼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바른 예가 행해지고 바른 사상이 퍼져나가게 하는데 나라의 힘을 기울이고, 백성들 앞에 나서 나라 일을 하던 목민관을 바른 생각과 행동을 할 인격자에서만 고르려고 애쓰던 옛날 「선비정치」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정치란 바로 무질서한 군중을 책임 있는 시민으로 이끌어 가는 기술이며, 따라서 정치의 핵심은 사람들이 따르고 싶어하도록 바른 행동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다.
나라를 부하게 하는 길은 무얼 많이 생산하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이 나라를 부하게 하는 것이 곧 자기를 부하게 하는 것이고, 공공질서와 공물에 피해를 끼치는 것이 내 스스로에게 피해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 더 중하다. 그런 뜻에서 .국민들을 바르게 이끌어갈 바른 지도자들을 키워내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의사·과학자를 키워냈으나 상당수는 외국에 가버리고 말았다. 이 땅에 마음붙이게 할 풍토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생산하고 축적해 놓은 자산 중에 상당부분은 사치와 호사를 위해 외국에 갖다 바쳤다.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 이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당면과제는 국궁민부를 국부민부로 고쳐나가는 것이고, 그걸 위한 분위기를 조성해나가는 일이다. 모두가 바라고 뛰고 싶은 그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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