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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서울대교수·불문학|논쟁·문제작 편애|선동적 작품을 "문제작"으로 오인|"후세에 가서 더 높이 평가된 작품 많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한국문학계의 범폐 중의 하나는 논쟁과 문제작을 편애하는 경향이다. 무언가 선동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해야만 관심을 보이는 한국사회의 집단무의식이 문학계에도 작용하고있다는 증거이겠지만 논쟁과 문제작에 대한 편애는 거의 편집 광적이다. 인쇄매체와 전자매체들은 논쟁과 문제작을 경쟁적으로 만들어 내려하고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에는 거의 틀림없이 왜 논쟁이 없고 문제작이 없는 가라는 자탄에 사로잡힌다.
그 자탄은 대개 한국문학의 장래를 크게 우려하면서 행해지는 자탄이기 때문에 성실하고 엄숙한 정조를 드러낸다.
그 자탄을 견뎌내기 힘든 인쇄매체나 전자매체의 담당자들은 논쟁이나 문제작을 결사적으로 만들어낸다. 특히 논쟁의 경우 그 만듦의 방법은 대개 즉흥적이고 경련적이어서, 그 성과는 거의 없으며 그 주제는 대개 해묵은 주제의 되풀이이기 쉽다.
논쟁은 관점과 관점, 세계관과 세계관의 부딪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글은 그것이 아무리 비 논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논쟁적이다. 글에 글 쓴 사람의 관점이나 세계관이 안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은 글쓴 사람의 세계인식의 결과다. 그 세계인식은 그것이 아무리 독창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세계인식과 관계를 맺고있다.
사람은 진공 속에서 살수 없듯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수가 없다.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가 바로 어떤 사탕의 삶의 양태이다. 글은 다른 사람의 세계인식울 수용·변용·첨삭하는 작업의 결과다.
바로 거기에서 글쓰기의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텍스트라는 극단적인. 주장이 생겨나는 것이지만, 여하튼 글에서 중요한 것은 글은 어떤 글이든 논쟁적이라는 사실이다.
글은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어떤 글을 목표하고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글은 다른 글과 자기를 연관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들만이 목청 높여 논쟁거리를 찾는다. 왜냐하면 그 요구에 민감한 사람들은 모든 글이 논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논쟁 만들기에 그토록 적극적인 대중매체담당자들의 눈에는 재담시를 둘러싼 중견시인들의 집요한 싸움, 서울문화와 지방문화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채광석·민병욱·이윤택 등의 싸움, 80년대의 문학적 전환을 둘러싼 젊은 비평가들의 성실하고 끈질긴 대림·갈등 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논쟁이 없다! 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다. 논쟁은 급작스럽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지속적이며 끈질긴 것이다.
그것은 깊은 관심을 갖고 계속 남의 글을 읽는 사람들의 눈에는 선명하고 뚜렷이 드려나지만 요샌 무슨 싸움을 하나요? 라는 한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겐 그 파편만이 어쩌다 보일 뿐이다.
문제작은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다. 작가란 「발레리」라는 시인의 말을 빌면 남들이 다 보고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작품은 문제 제기적이다.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서정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큰 문제가 들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중매체가 문제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문제작이 아니라 선동적이고 충격적인 요소를 간직한 작품들이다. 예술적으로는 좀 미숙하다 하더라도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 유의 문제작 만들기는 큰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을 갖고있다.
제일 큰 것은 선동적이고 충격적인 것은 좋은 것이라는 무의식적 가치판단이 확고해지는
것이다. 선동적이고 충격적인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비 선동적이고 비 충격적인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작 편향은, 선동적이고 충격적인 것이 좋은 것이라는 편견을 낳게 한다.
문학은 삶의 구체성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삶의 요소들에 다 같이 관여한다. 그것은 하나의 문제는 다른 여러 문제들과의 관련하에서만 그 의미를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해, 삶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이끌고 간다. 때로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에 있어서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들을 감추기 위한 허위문제라는 것도 문학은 보여준다.
문제작편향은 충격적이며 선동적인 문제만이 문제라고 잘못 인식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문제를 삶의 구체성에서 유리시킬 수 있다. 문제가 삶의 구체성에서 유리될 때 문제파악의 시각은 편파적이고 독선적이 되기 쉽다.
그 다음 문제작편향은 모든 작품이 본질적으로 다 문제 제기적이라는 명제를 망각하게 한다. 문학은 세계를 그대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세계를 글쓰는 사람의 세계관에 의해 재구성한다. 작품 속의 세계는 있는바 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재구성된 세계이며 재구성의 원리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 제기적인 세계다.
문제작이나 비문제작이나 다같이 문제 제기적이다. 문제작만이 문제 제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그 다음 문제작편향은 문제작을 쓰지 않은 사람도 중요한 작가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 못하게 한다. 그러나 문학사는 당대에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작품들이 사실은 더 큰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던 예들로 가득 차 있다.
한국현대시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나 「플로베른 의 『마담 보바리』같은 작품들은 그 좋은 예들이다. 그 다음 문제작편향은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는 환상을 깊게 심어준다. 내용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고 형식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문제작은 내용의 문제작이다.
내용의 문제작들은 주제와 표현을 대립 가능한 것으로 가르고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린다. 주제와 표현은 그러나 대립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상대방을 필요로 하는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 표현은 안 좋지만 주재는 좋다라는 말은 그러니까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모든 주제는 그것에 알 맞는 표현을 요구한다.
내가 논쟁과 문제작들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글은 논쟁점과 문제점들을 간직하고있다는 것이다. 글읽기가 어려운 것은 그것들을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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