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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9)-제 80화 한일회담 (198)|2개의 빅카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혁명정부는 그무렵 한일회담을 연내에 해치우겠다고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외교의 어려움, 특히 한일관계의 까다로움에 접해보지 않은 군사정부로서는 회담의 연내타결에 별로 문제가 없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러한 믿음의 뒤에는 「기시」(안신개) 전 일본수상이나 「이시이」 (석정) 일한문제간친회장,「아다찌」 (족립)일본상공회의소회장,「우에무라」 (야촌) 경단련 부회장등 정·재계 거물들의 친한발언 내지 그들의 일본정부에 대 한 조속한 회담재개 촉구발언이 힘이 됐다.
일본의 태도가 「군사정부와 회담을 결판내는 것이 상책」 이라는 쪽으로 선회하는 기미가 보였던 만큼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나가면 연내타결도 가능하리라는 것이 혁명정부의 판단이었다.
이런 배경속에서 혁명정부는 김유택 경제기획원장의 방일에 2개의 빅카드를 휴대시켰다.그 하나는 청구권과 평화선문제를 연계시켜 일괄타결함으로써 연내에 회담을 매듭짓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구권 규모를 8억달러선으로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측에 정치적 타결을 촉구해 어느정도 전망이 설 경우 이같은 우리의 대안을 제시할 작정이었다.
8억달러라는 청구권규모는 당시의 우리 입장에서는 최저선이였다. 이승만박사의 자유당정부 아래서는 청구권 규모가 공식으로 제시된 적이 없었고 구체적인 숫자도 파악되지 않은채 막연히 20억에서 80억달러까지의 숫자가 오락가락했었다. 80억달러라는 숫자의 근거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중 필리핀을 1년간 점령했던 댓가로 2억달러를 지불한 전례에 비추어 36년간 식민통치의 댓가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정·재계 거물들과 접촉한 김경제기획원장은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채 귀국해야만했다. 물론 8억달러라는 숫자를 내밀지도 못했다. 일이 그렇게 된것은 우리의 열정에 비해 일본의 수용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준비가 덜 되었다기 보다는 시기가 성숙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일본정치인들이 말하는 「조속한 한일회담 타결」 은 상당부분 립서비스였고 일본정부의 의지로까지 연결돼 있지는 않았다.
내각에서는 민주당 정부때부터의「고사까」외상이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도 6개윌내에 좌경화될것」이라며 적극론을 폈을뿐 「미즈따」(수전) 장상, 「사또」 (좌등) 통산상등 돈줄을 쥔 실력자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사또」씨는 『배상성격의 재산청구권은 한푼도 응할수 없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민법상의 채권·채무행위, 증빙서류나 법적근거가 있는것에 한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는 또 『청구권문제를 배상성격으로 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한국을 불법침략·강점한것을 우리 스스로 시인하는 결과를 빚지않기 위해서』 라고 김기획원장에게 공공연하게 얘기했다.
4년이나 흐른 후의 얘기지만 한일회담은 결국 그 「사또」 씨가 수상이 된 후에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 수상이 되기 전과 된 연후의 입장이 1백80도 달라진 셈이라고나 할까.
「요시다」 (길전)학교의 똑같은 우등생으로 「이께다」 수상보다 오히려 한발 앞서나갔지만 자민당 내의 세력균형 때문에 수상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또」 씨가 한일 관계타결이라는 업적을 정치적 라이벌인 「이께다」 씨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원장은 결국 군사정부의 한일회담 조기타결 의지만을 일본 조야에 인식시키고 방일 열흘만인 9월9일 귀국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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