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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으로 돌직구 날리는 센 여자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진 Mnet]

힙합이라는 장르를 좋아해 본 적 없다. 랩 역시 그랬다. 풍성한 멜로디와 안무를 선보이는 아이돌의 사랑스러운 무대에 왜 꼭 랩 소절이 들어가는지 늘 의문이었다. 한창 맛있게 먹던 음식에서 좋아하지 않는 소스를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내게 랩은 좋아하는 노래에 붙은 사족이었다.

내 취향과는 다르게,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 Mnet은 2012년 래퍼 발굴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를 기획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후 매년 새로운 시즌을 선보이며 올해도 네 번째 시즌을 준비할 만큼 높은 호응을 끌었다. 도끼, 바비, 스윙스 같은 스타 래퍼들을 탄생시킨 것은 물론, 이 방송을 통해 발표한 랩송들이 각종 음원 순위를 싹쓸이하기도 했다. ‘쇼 미 더 머니’의 이런 인기에도 난 여전히 힙합과 랩에 대한 심드렁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그런 내게 올해 초, Mnet의 또 다른 래퍼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 ‘언프리티 랩스타’가 번쩍하고 나타났다. 남성 위주의 힙합계에 실력 있는 여성 래퍼들을 알리겠다는 취지로, 우리나라 최초 여자 래퍼 컴필레이션 앨범의 주인공을 선발하는 프로그램이다. 1월 말 방송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프로그램은 내 관심 밖에 있었다. 친구들의 추천이 이어졌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는 선입견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때마침 ‘러블리즈’를 필두로 새싹 같은 신인 걸그룹들이 바쁘게 활동하던 터라 관심을 쪼갤 여유도 별로 없었다. 꽃 같은 걸그룹들의 무대를 보다, 지난해 ‘짧은 치마’ ‘단발머리’ ‘사뿐사뿐’을 연속으로 히트시킨 ‘AOA’의 래퍼 지민이 ‘언프리티 랩스타’에 출연한다는 정보를 접한 건 우연이었다. 어느 날 TV 채널을 돌리다 마주친 ‘언프리티 랩스타’를 가만히 지켜본 건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그러다, 마치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서핑 자격증이라도 따고 돌아온 것처럼 까무잡잡한 얼굴의 래퍼 제시가 다른 참가자들과 심사위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순간과 마주쳤다. “너희들이 뭔데 날 판단해. 우린 팀이 아니야. 이건 경쟁이야.”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때의 기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그 기분 말이다. 요즘 TV를 장악한 무수한 오디션 프로그램들에서 참가자는 늘 약자다. 심사위원들이 참가자들의 인성까지 심사하려 들어도 그저 묵묵히 견뎌야 한다. 참가자들이 발톱을 꺼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무대에 섰을 때뿐이다. 그때가 아니라면 참가자들은 그저 착하고 열정 가득한 얼굴로 주어진 미션을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그것을 ‘언프리티 랩스타’의 참가자 제시가 통쾌하게 부숴버리고 있었다.

그 쾌감을 맛본 그날 밤, ‘언프리티 랩스타’를 1회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참가자들은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동시에, 그동안 여성 래퍼로서 느껴온 서러움을 나누며 뜨겁게 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인기 종목의 운동선수처럼 무관심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삶을 시적인 가사와 직구 같은 박자로 풀어냈다.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주는 울림 덕에, 그들이 랩을 하며 추임새처럼 뱉는 욕설과 격앙된 몸짓마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 뜨거운 몸짓은 걸그룹의 사랑스러운 춤동작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힙합에 무관심했던 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 래퍼들의 팬이 됐다. 힙합의 매력에 푹 빠진 나머지 직접 랩 가사를 쓰고 있다. ‘폭주 기관차 같은 비트에 실린 인생의 커브, 관객의 심장에 직구로 던져….’

‘언프리티 랩스타’의 첫 번째 시즌은 3월 26일 치타에게 우승을 안기며 막을 내렸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어서 빨리 이 프로그램을 정식으로 다운받아 보시길. 여러분도 여성 래퍼들의 열정에 빠져들 것이라 장담한다.

진명현 노트북으로 드라마, 예능, 다큐멘터리 등 장르 불문하고 동영상을 다운받아 보는 남자, 애잔함이라는 정서에 취하면 헤어나오질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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