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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이 세계를 '난타' 하는 방식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여성중앙] 성공한 문화 CEO로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일대일로 마주 앉은 그에게서는 부드러움과 쿨한 면모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러나 일에 대한 열정이나 삶의 방식이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건 예상한 대로였다.

50년 전 아역 연기자로 데뷔해 내일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송승환(58)은 그 사이 연기자를 넘어 공연 기획자로, 문화 사업가로 인생의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특히 18년 전 처음 무대에 올린 비언어극 퍼포먼스 ‘난타’가 대히트를 치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상품으로 떠오르자 송승환이라는 이름 뒤에는 ‘성공한 문화 CEO’라는 새로운 타이틀이 따라붙었다. 최근 ‘난타’가 누적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 한국 공연 사상 최초다. 중국 시장 진출을 앞두고 1억 관객 돌파를 꿈꾸고 있는 송승환 PMC프로덕션 대표를 만났다.

Q : 17년 동안 1000만 관객이 ‘난타’를 봤어요. 공연에서 1000만이라는 숫자는 참 낯설어요
기획자로서 이 정도의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런저런 목표들을 하나씩 달성하다 보니까 1000만이라는 숫자를 보게 된 것 같아요. 그동안 ‘난타’를 사랑해주신 관객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Q : 공연에서 보통 성공했다고 보는 관객 수는 얼마인가요
공연은 영화와 달라서 정해진 박스가 있어요. 현재 ‘라카지’가 잘되고 있는데 LG아트센터에서만 하고 있죠. 1000석 규모로 4개월 동안 120회 진행하는데, 그래 봤자 12만 명이에요. 보통 10만 넘으면 ‘터졌다’고 하니까 ‘라카지’는 대박인 거죠. 영화처럼 스크린 수가 수천 개가 아니니까 한계가 있어요. 공연의 성공 기준은 공연 기간 동안 전 석이 다 팔리느냐 마느냐예요. 그런 점에서 1000만은 굉장히 큰 숫자죠.

Q : 이런 환경에서 ‘난타’가 질주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난타’의 강점은 무엇보다 비언어극이기 때문이에요. 비언어극은 내국인과 외국인이 함께 즐길 수 있잖아요. 또 세계인이 느낄 수 있는 보편성에 있어요. ‘난타’는 코미디라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요. 요리사들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누가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요. 여기에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가족 쇼라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지금까지 공연할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Q : 큰 줄기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수정했다고 들었어요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늘 업그레이드해야죠. 지금도 수정 중이에요. 공연에 접목해보고 싶은 기술도 있어요. 3차원 홀로그램. 도마를 두들길 때 소리의 영상이 함께 움직이는 식이죠. 이 부분이 접목되면 한국의 강점인 디지털 기술을 소개하는 장이 될 겁니다.

Q : 1000만 관객 돌파 외에도 ‘난타’가 남긴 기록이 참 많아요
지난해까지 51개국 290개 도시에서 총 3만 1290회 무대에 올랐어요. 미국, 일본, 동남아는 물론 중동, 아프리카, 남미까지 말 그대로 세계 구석구석을 누볐죠. 공연에 소모된 칼과 도마도 엄청나요. 칼이 1만9000여 자루, 도마가 2,100개 정도 사용됐어요.

Q : 공연 중에 ‘난타’된 채소는 얼마나 되나요
1회 공연할 때 사용되는 채소는 오이 10개, 당근 10개, 양파 4개, 양배추 7통이에요. 지금까지 공연하면서 쓰인 채소들을 다 합치면 1000만 개 가까이 될 거예요. (실제로 지금까지 ‘난타’에 사용된 채소는 오이 31만2900개, 당근 31만2900개, 양파 12만5160개, 양배추 21만9030통이다. 이 모든 채소를 더하면 무려 승용차 315대의 무게와 맞먹는다. 17년 동안 판매된 ‘난타’ 티켓을 쌓아 올리면 3.3km나 된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두바이 부르즈할리파(824m)의 4배다.)

Q : 채소 선택의 기준이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소리가 중요해요. 사물놀이 리듬을 기초로 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리듬 장단을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하죠. 비주얼도 무시할 수 없어요. 오이나 당근은 썰 때 나는 소리가 굉장히 경쾌하고, 양배추는 썰 때 날아가는 비주얼이 예뻐요. 눈이 내리는 것 같거든요.

Q : 새로 시도해보고 싶은 소리나 비주얼이 있나요
사실 수타면 만드는 걸 무대에서 재현해보고 싶어서 시도한 적이 있어요. 4명이 밀가루를 반죽하고 4명이 사물놀이 장단으로 치면서 밀가루 반죽이 가느다란 국수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단골 수타 자장면 집 주방장을 중국집 영업시간이 끝난 후 모셔와서 밤 10시부터 수타면 만드는 걸 배웠어요. 보름 이상 연습했는데, 결국은 수제비 끓여 먹고 포기했죠. 되긴 되는데, 어떤 날은 되고 어떤 날은 안 돼서요. 공연은 매일 라이브로 하는 거라 변수가 있으면 위험하거든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Q : 배우들에겐 엄청난 고역이겠어요. 몸을 쓰고 기술을 익혀야 하니까요 연습 도중 손을 다치기도 하고 관절에 무리가 생기기도 해요. 그래서 다른 연극배우들하고 달리 ‘난타’ 배우들에겐 마사지 쿠폰을 줘요. 배우들이 피곤하다 싶으면 제가 정해놓은 마사지 숍에서 전신 마사지를 받을 수 있죠. 병 주고 약 주는 셈인가요?(웃음)

Q : ‘난타’를 거쳐 간 배우들은 자부심이 있을 것 같아요
200여 명의 배우가 거쳐 갔어요. 그중에는 요즘 영화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승룡씨와 김원해씨, 그리고 TV에서 활약하는 장혁진씨 등이 있죠. 다들 짧게는 4~5년, 길게는 10년씩 공연했어요.

Q : 류승룡씨는 어땠나요
초연을 끝내고 해외 진출을 위해 팀을 늘리려고 오디션을 봤어요. 그 현장에 류승룡씨가 왔죠. 일단 굉장히 재밌었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무술이나 몸으로 할 수 있는 장기들을 보여주면서 왜 이 공연을 하고 싶은지 강하게 어필했어요. 그래서 섹시 가이 이미지랑 잘 맞아서 캐스팅했고, 역시나 잘했어요. 4~5년 정도 하다가 영화 쪽으로 잠시 외도한 뒤에 다시 ‘난타’ 연출부에 들어와 2~3년 활동했어요. 그러다 영화에 한 편, 두 편씩 조연으로 출연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스타가 됐네요. 그때부터 떡잎이 남다르긴 했어요.

Q : 18년 전 초연 당시 이야기도 궁금해요
극장 대관조차 안 되던 시절이에요. 알려진 대본도, 유명한 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닌 데다 비언어극이라는 최초의 장르라서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었죠. 극장 대관 담당하는 분을 저희 연습실로 모셔다가 연습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런 거라고 설명하고서야 대관할 수 있었죠. 해외 마케팅도 만만치 않았어요. 초연 때 일본 도쿄로 날아가 현지 여행사를 찾아다니며 한국 여행 코스에 넣어주기를 부탁했어요.

당시만 해도 2박 3일 일정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품목은 때밀이 목욕이랑 동대문 의류 상가 야간 쇼핑이었거든요. 우여곡절을 거쳐 어렵게 일본의 한 여행사를 설득해 ‘난타’를 일정에 넣었어요. 나중에 설문 조사를 했는데, 제일 인상 깊은 품목 1위로 ‘난타’가 뽑혔어요. 이후 입소문이 나면서 일본 관광객이 몰려왔죠.

Q :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요
‘난타’의 첫 해외 공연이 1999년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열렸어요. 우리 것으로 브로드웨이를 능가하는 공연 작품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각오로 도전한 거였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터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현지 매스컴의 조명을 한 몸에 받았어요. 에든버러에서 맺은 공연 계약금으로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진 빚을 갚을 수 있었어요.

Q : ‘난타’로 번 돈이 꽤 되죠
3만원짜리 공연을 1000만 관객이 봤으니 3000억원일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매출이고 수익은 아니에요. ‘난타’로 많이 번 만큼 많이 썼거든요. 해외 마케팅하고, 전용 공연장을 만드는 데 비용이 꽤 많이 들었어요. 또 그동안 연극과 뮤지컬 40여 편을 만들었는데 손해를 많이 보다 보니 개인적으로 만질 수 있는 돈은 크지 않더라고요.

Q : ‘난타’에 이어 ‘롱런 아이템’으로 키우는 공연은 없나요
‘뮤직쇼 웨딩’이에요. ‘난타’가 리듬 중심이라면 ‘뮤직쇼 웨딩’은 관객들이 가볍고 신 나는 음악을 들으며 쌓인 피로를 풀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B급 쇼’예요. 새로운 개념의 카바레 쇼죠. 지난해 객석 점유율이 80%를 넘었는데 나날이 반응이 좋아지고 있어서 서울 홍대 쪽에 전용관을 오픈했어요. 어린이극 제작에도 꾸준히 공들이고 있어요.

저 스스로 어린 시절 문화적 자극의 수혜자라고 믿기 때문이죠. 공연 관람은 일종의 습관이에요. 어릴 때 공연을 보면서 재미있고 도움이 되며 깨달음이 있어야 커서도 공연을 보죠.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에 보는 공연이 인생관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Q : 조만간 새로운 작품이 나온다고요
3월에『백설 공주』를 19금 코드로 비튼 창작극 ‘난쟁이들’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에요. 찰리 채플린을 소재로 한 비언어극 작품도 기획하고 있고요. 채플린을 전 세계 사람들이 알지만 그가 등장하는 연극이나 뮤지컬은 거의 없었던 거 같아요. IT 영상이 발전하고 있는 만큼 홀로그램 같은 영상과 채플린을 접목한 이제껏 없던 작품을 만들어볼 생각이에요.

Q : 이런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좋아하는 일을 찾아 미친 듯이 덤벼들어 한길을 간 것, 그게 제 삶의 열정이고 배우로, CEO로 살아가는 동력이에요. 저는 후배들에게 어떤 분야든 간절함이 있으면 무조건 도전하라고 해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기만의 길을 만들라는 거죠.

저는 전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가서 첫 공연에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쳐줄 때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처럼 기뻤어요. 한 달 공연이 전 회 매진됐을 때는 월드컵 4강에 오른 듯한 희열을 느꼈고요. 앞으로도 쭉 도전하고 시도할 겁니다.

사실 ‘송승환’ 하면 윗세대 사이에선 아역 배우로 통한다. 8세에 데뷔한 그는 어려서부터 말재주가 좋았다. 아역 데뷔를 하게 된 계기도 말재주 덕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참가한 어린이 동화 구연 대회에서 1등 했고, KBS 어린이 프로그램에 수상자 자격으로 출연했다. 그러다 방송국 프로듀서의 눈에 들었다. 그때 첫발을 디딘 뒤 지금까지 방송국을 찾고 있다.

Q : 제작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배우’임을 잊지 않는 것 같아요. 지난해 12월 배우로 복귀하셨어요
20년 전에 윤석화씨와 함께했던 ‘사의 찬미’ 이후 뮤지컬은 처음이에요. 당시 전 음치여서 노래를 하지 않고 피아노만 쳤죠. 다행히 이번에도 네 마디만 부르면 돼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웃음). 그리고 엄밀히 말해 뮤지컬 무대에 서는 게 20년 만이고, 연극이나 드라마는 꾸준히 해왔어요. 2010년 연극 ‘에쿠우스’로 무대에 올랐고, 2011년엔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감초 역으로 출연했죠.

Q : 복귀작으로 ‘라카지’를 택한 이유가 있나요
이 작품은 제가 출연하기도 하지만, 공동 제작자로 참여해요. 저는 2막에 잠깐 나오는 여주인공 아버지 에두아르 딩동 역을 맡았죠. 잠깐 나오지만, 비중 있는 역할이라서 좋은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했는데 잘 안돼서 제가 하는 거예요(웃음). (뮤지컬 ‘라카지’는 게이 부부가 아들을 보수적인 집안의 사위로 장가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작품이다. 3월 8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

Q : 연기에 연출에 제작하는 것도 벅찬데, 요즘은 각종 행사나 미팅으로 스케줄이 빡빡하다고요. 시간을 쪼개 쓰는 노하우가 있나요
아역 배우 출신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게 익숙한 편이에요. 매니저 없이 혼자서 스케줄을 조율하거든요. 아주 많이 바쁠 때는 한 달을 90일이라고 생각하고 스케줄을 짜요. 오전, 오후, 밤으로 나누면 하루가 3일이 되거든요. 그렇게 90일로 스케줄을 짜면 중간에 며칠은 쉴 수 있어요.

Q : 연기와 제작 사이에서 균형은 어떻게 맞추나요
억지로 균형을 맞추기보다 그냥 그 시기에 집중할 수 있는 일을 해요. 여덟 살 때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하면서 배우라는 직업이 좋긴 했지만, 한계가 느껴지더라고요. 캐스팅이 돼야 할 수 있으니까 수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직접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거예요. 젊을 때는 여기저기 찾는 곳이 많아서 연기 쪽을 열심히 했고, 나이가 들면서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할 수는 없으니까 제작 쪽에 비중을 두게 됐죠. 특히 ‘난타’를 제작한 이후에는 워낙 일이 많았어요. 최초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가고. 최초로 브로드웨이에 가고, 투어를 다니다 보니까 아무래도 더 이 일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Q : 제작하는 데 있어 원칙이 있다면요
이 일이 과연 재밌을까 하는 거예요. 그래야 나중에 잘못되더라도 후회가 없거든요. 항상 ‘How(어떻게)’를 생각하는 편이에요. 명예와 돈은 그다음 문제죠.

Q : 송승환이란 이름 앞에는 ‘성공한 문화 CEO’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데, 스스로도 성공했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성공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운과 능력과 인간성의 삼박자가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세 가지에 다 해당되지 않나 싶어요. 운 좋게 아역 배우가 됐고, 다행히 이 분야에 타고난 DNA가 있었고, 인간성 또한 나쁘지 않아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지금 제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앞으로 갈 길이 먼걸요.

지금의 그를 보면 부족할 것 없이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남모르는 흥망성쇠가 있었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연기는 취미 생활로 끝내고, 대학 가서 새로운 일을 할 작정이었다. 재수 끝에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중동 건설 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어쩌면 중동 사막을 주름잡는 사업가가 됐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2학년이 돼서 돌연 자퇴를 결심하고 대학을 뛰쳐나왔다. 부모님은 결사반대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아들의 고집을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극단에 들어가서 연기를 다시 시작했다.

Q : 어려서부터 소신이 강했나 봐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뿐이에요. 물론 고민도 컸어요. ‘내가 배우로 인생을 산다면 어떻게 살까’, 반대로 ‘공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등 노트에 막 쓰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것 같아요. 그때 나이가 스무 살이었어요. 남들 기준에선 어린 나이지만, 8세부터 연기 생활을 한 12년 경력을 감안하면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니에요.

Q : 아내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1981년에 처음 만났어요. ‘젊음의 행진’ MC 시절에 자주 가던 카페의 단골손님끼리 조우였죠. 자연스럽게 아내와 합석했는데, 볼수록 맘에 들더라고요. 그다음부터 진지하게 만나기 시작했어요.

그는 아내와 3년 연애와 3년 동거를 거쳐 결혼했다. 약혼만 하고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사실상 약혼이 결혼을 뜻하는 것과 다름없었지만,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건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정작 두 사람은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러운데도 주변에서는 아직까지도 아이에 대한 질문을 하곤 한다. 그가 그처럼 일에 매달릴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아빠 역할 하나가 빠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Q : 친구 같은 부부일 것 같아요
동갑내기예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내와 모든 일을 함께하죠. 여행도 자주 가고요. 아이가 있다가 없으면 허전할 텐데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어요(웃음).

Q : 너무 바빠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겠어요
요즘은 특히 더 그런 편이에요. 집에서 밥 먹는 일이 한 달에 고작 한두 번에 불과하죠. 그러다 보니 아내도 스케줄을 만들어 움직여요. 아침에 운동하고, 교회 봉사 활동도 하고, 집 안도 구석구석 친환경적으로 꾸미고. 외로울 틈이 없도록 자기 매니지먼트를 하는 거죠. 아내가 낙천적인 성격이라 주어진 상황을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Q : 10년 뒤 모습을 상상해본다면요
지금처럼 계속 연기하고 제작하고 싶어요. 배우가 좋은 점은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거잖아요. 좀 더 나이가 들면 멋진 노역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제작자로서는 우리 스토리와 우리 음악으로 더 좋은 창작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요.

수입 뮤지컬이 아닌 수출을 하는, 영화처럼 좀 더 산업화될 수 있는 분야로 뮤지컬을 만드는 거죠. 지금부터 하나씩, 찬찬히 밑그림을 그려나갈 예정이에요. 아울러 이젠 건강도 신경에도 쓰려고 해요. 올해 중국 시장에 진출해 중국 법인을 설립하고 확대 재생산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니까요. 1억 명 관객 돌파를 위해 새 출발하겠습니다.

기획 여성중앙 정은혜 기자, 사진 박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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