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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과학이여 절제하라, 윤리여 마음을 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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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은 과학기술이 행사하는 무한권력 행사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포기하는, 그런 '절제할 줄 아는 과학'이다. 외경심을 가지고 관조를 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야말로 윤리학의 과제다" "인간 복제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한 개인의 실존적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만의,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인격의 소유라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근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 속에서 새삼 음미해볼만 한 말이다. 그것은 21세기 생태철학의 예언자로 불리는 한스 요나스(1903~93 사진)의 주저 '기술 의학 윤리'(이유택 옮김, 솔 출판사)에 담긴 생명 윤리학의 메시지다. 요나스는 이 책에서 자연과학 분야의 폭발적인 발전이 윤리학에 '들이대고 있는' 현안을 집중적으로 다른다. 물론 과학의 책임을 묻는 쪽이다. 이 현대윤리학의 고전 첫 완역본을 놓고 생명공학자인 서울대 최재천 교수와, 종교철학을 전공한 역사학자인 백승종 푸른역사연구소장의 리뷰 두 개를 나란히 싣는다.

열려가는 판도라의 상자 닫으면 옆구리 터져
인문.자연과학자 손잡고 고민해야

연일 신문 1면에 황우석이란 이름 석 자가 등장하지 않는 날이 없다. 단군 이래 한 사람의 과학자로 인해 온 나라가 이처럼 들썩거린 일이 있었던가. 이번 사태는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기술 의학 윤리'는 거의 20년 전에 나온 생태철학자 한스 요나스의 핵심적인 책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관심사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제8장 인간복제-우생학에서 유전공학으로'는 요나스가 1974년 발표한 논문이다.

줄기세포나 유전자 복제에 관한 연구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도 않았던 30년 전에 이처럼 소상하게 미래를 예측한 요나스의 혜안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요나스는 유전공학 기술의 가공할 권력과 그에 따른 책임 문제를 철학의 마당으로 끌어들인 최초의 인물이다.

"윤리와 과학은 인류 문명을 이끌어가는 두 수레바퀴"라는 황우석 교수의 말은 너무도 당연한 명제이지만 어쩐 일인지 현실에서는 이 두 바퀴의 회전속도가 사뭇 다른 것 같다. 첨단 과학 기술, 그 중에서도 생명공학은 저만치 앞서 '눈 덮인 들판'에 여기저기 발자국들을 남기고 있는데 윤리가 미처 그 뒤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미래에 대한 책임 윤리'를 전제로 하여 절제할 줄도 알고 포기할 줄도 아는 겸손한 과학을 주문하는 요나스의 호소에 심정적으로는 일단 동의한다. 하지만 끝내 개념적인 완고함을 떨쳐내지 못하는 그의 윤리철학이 우리 시대에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가질 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다. 인간의 도덕성은 당연히 진화의 산물이지만 윤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과학의 시대를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이번 MBC 'PD수첩'사태는 윤리는 고사하고 과학에 대한 무지와 과학자에 대한 불신에서 일어난 일이다. 과학은 우리 인간이 하고 있는 활동 중 가장 민주적인 활동이다. 언론의 견제는 언제나 필요한 것이지만 과학은 그 자체 내에 이미 검증 기능을 갖추고 있다.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 중의 하나가 바로 검증 가능성이다. 어느 특정한 과학자의 연구를 구태여 똑같이 재현해보지 않더라도 그 주제가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검증되게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을 잠시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몇 사람을 늘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늘 속일 수는 없다"고 한 링컨의 말은 과학에 더 적확히 들어맞는 말이다.

과학자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것은 실로 심각한 일이다. 이같은 현상의 궁극적인 원인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간극에 있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리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억지로 뚜껑을 닫으려 하면 옆구리가 터지게 되어 있다. 인문학자들이 자연과학자의 손을 붙들고 판도라의 뚜껑을 조심스레 함께 열어줘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인문학자들을 쳐다보기 전에 자연과학자 자신의 책임부터 묻고 싶다.

차세대 자연과학자들은 과학 훈련과 더불어 반드시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 생명공학 연구에 관하여 하루 빨리 우리 과학자들이 스스로 따를 수 있고 사회가 수긍할 수 있는 윤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나는 그런 기준을 윤리학자들이 만들어 과학자들에게 던져주는 것보다는 과학자들이 주도하고 윤리학자들이 도와주는 형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참된 자유는 스스로 구속하는 데서 나온다." 내가 먼저 나를 구속하면 남이 나를 구속하지 못한다.

최재천(서울대 교수.생명공학과)

지동설.진화론을 생각해 보라
과학과 윤리는 설득과 타협의 과정이다

황우석을 둘러싼 논쟁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터라, 과학기술과 윤리의 싸움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런 대결은역사 속에서 여러차례 거듭됐다. 역사학도인 내가 보기엔 투쟁의 전반부는 늘 윤리의 첫 승으로 장식된다. 윤리 진영은 기성 가치관을 앞세워 과학의 행보를 가로막아왔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윤리 진영이 애초 염려했던 사태는 끝내 발생하지 않았고, 과학은 최종에서는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해왔다.

21세기 과학.윤리 대결의 화두인 생명과학, 특히 배아줄기세포에 관한 연구를 둘러싼 논란을 보자. 생명과학연구는 난치병을 극복하리란 희망을 던져준다. 악성 질병을 원천적으로 없애는 것은, 교육을 통해 삶의 풍요를 도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적으로도 타당성이 인정된다. 황우석 등 과학자들은 이런 자유주의 입장을 대표한다.

하지만 이를 공격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 책의 저자 요나스가 바로 그런 흐름을 이끈다. 그가 말했듯 자연은 때로 열등 유전자를 지목해 자연도태를 유도한다. 문제는 인위적으로 이런 자연법칙을 무시 내지 조작한다면 자연계 평형은 깨질 것이다. 다른 문제도 있다. 특정 유전자만 선호하면 유전이 획일화되고, '규정 불가'를 핵심으로 하는 생명의 본질은 실종될 것이다. 미래윤리학의 설계자 요나스는 이 책에서 잘라 말한다.

"우리는 이런 모험을 감행할 권리가 없으며, 지혜와 가치관, 절제 등 그 채비를 갖추지도 못했다"고…. 인간복제연구의 출발을 30년 앞서 꿰뚫어 볼 정도로 혜안을 가졌던 그의 미래윤리학은 과학기술이 막강한 권력의 원천이라는 성찰에서 비롯됐다. 과학기술을 통제하기 위한 책임에 대한 강조는 그 때문이다. 단 그가 말한 책임의 대상과 범위는 매우 넓어 모든 생명체 및 지구의 현재와 미래까지 포함한다. 보편적 도덕관념인 두려움, 겸손, 그리고 절제란 개념으로 그는 윤리학의 뼈대를 삼았고, 그것이야말로 현대 윤리논쟁의 초석이다.

과학의 책임을 강조한 그는 생명의 존엄성에 위배되는 일체의 생체실험을 반대한다. 우선 그는 기형적 생명이 만들어질 가능성을 염려한다. 훗날 한 마리의 양을 복제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무려 272번이나 똑같은 실험을 되풀이함으로써 그런 우려를 사실로 보여준 바 있다. 애써 복제한 동물도 유전적 결함이 많아 금방 죽고 말았다. 또 하나 실험실에서는 여러 이유로 생명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역시 현실로 드러났다. 살아있는 세포, 즉 인간생명을 인위적으로 훼손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윤리문제가 제기됐다.

끝으로 실험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오류'가 발생한다는 경고다. 사실 현재로선 누구도 복제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던가. 곰곰 따져보면 과학과 윤리의 만남을 투쟁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설득과 타협의 과정으로 봐야 한다. 자칫 교황청의 파문으로 이어질 뻔 했던 갈릴레이의 지동설 주창, 기독교적 창조론에 대립했던 라마르크의 진화이론이 모두 그런 과정을 밟았다. 지금 여론이 쏠린 줄기세포 건도 결국 그러리라 나는 짐작한다.

요컨대 "눈 덮인 들판에 처음 발자국을 남기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연구"(황우석)하되, 요나스가 남긴 다음의 말의 뜻을 거듭 캐물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행복은 마땅히 증진되어야 하고,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연을 변형시킬 수 있지만, 인간의 행복증진을 위해 과연 자연을 얼마만큼 변형시켜야 하는가?"

백승종(역사학자.푸른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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