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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의 이상과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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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 미국 대학에서 공부했던 유학생이 지금 다시 같은 캠퍼스에 돌아오면 크나큰 변화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우선 여학생들의 옷차림이 한결 단정하며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이 머리를 길게 땋은 지저분한 남학생의 모습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게도 시끄럽던 마이크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총장실이나 학장실에 몰려와 따지고 덤비며 항의하는 학생이 없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수업시간에는 꼬박꼬박 들어오며 도서관에는 한결같이 조용하게 책을 뒤지는 학생들의 수가 많은 것에 놀란다. 스트라이크나 데모 혹은 징병도피·체포 등과 같은 화제대신에 학생들은 엄청나게 오른 등록금·까다로워진 학점 어려워진 직장 문제들을 걱정한다. 학교가, 학생들이 크게 변한 것이다.
그 변화는 60년대 중순부터 7O년대 초순까지를 전반기로, 7O년대 초반부터 오늘날까지를 후반기로 나누어 크게 대조시킬 수 있다. 이 전반기를 이상주의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 후반기는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통할 수 있다.
이상은 현실이 비판될 때 싹튼다. 전반기동안 각 대학에서는 갖가지 형태의 비판의 소리와 비판적 행동이 확대되어 갔었다. 버클리 대학 캠퍼스에서 시작된「프리스피치 무브먼트」 가 「반 월남전」의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고 이렇게 시작한 비판의 불길은 마침내 모든 선진국가의 대학으로 번져가서 이러한 결과로 1968년 프랑스의 드골 정권이 무너지고 말게됐던 것이다. 캠퍼스 내에서의 현실비판운동은 월남전쟁에 의해서 절정에 달하게된다. 미국의 막대한 자원과 군사력을 동원한 먼 열대지방 월남에서의 전쟁이 미국 젊은이들에게는 극히 부도덕적인 제국주의적 표현이라고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구 세대의 지배자들이 군사적 세력, 자본가들의 세력과 결탁한 침략의 행위라고 판단됐던 것이다.
그러나 언뜻 보기와는 달리 월남전쟁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비판은 보다 근본적인 것에 대한 비판, 보다 포괄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 한 계기에 불과했다. 젊은 학생들의 비판의 눈은 사회체제, 더 구체적으로는 오늘날 산업사회를 지배하고있는 물질주의적 가치관, 이데올로기에까지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바탕으로 삼고있는 사회 구조 자체, 더 나아가서는 그 밑에 깔려있는 상업주의, 물질주의적 가치관 자체가 근본적인 비판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흑인폭동, 68년 무폭력 저항운동의 흑인인권지도자「마틴·투터·킹」의 암살사건, 순식간에 전 미국을 휩쓴 여성해방운동, 성해방운동 등이 같은 시기에 선풍같이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학생들의 반전운동이 우연한 돌발적인 현상이 아니라 더 전반적이고 더 큰 비판적 움직임의 한 표현에 불과했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운동은 현대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대 산업사회가 그 당시 학생운동의 철학적대변인 역할을 했던「마르쿠제」의 말대로「기술적 합리성의 비합리성」,「비인간성」을 노출했다고 판단됐던 것이다.
기성사회·기성질서·기성체제 ·기성가치·기성도덕관이 비판되고 그것과 대치되는 이른바「반문화적문화」가 젊은 학생들에 의해 주장됐다. 새로운 이상이 제안됐던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단순한 생활, 공동체생활에의 경향을 띄고 더 적극적으로는 마리화나와 같은 마약에의 의존, 성의 해방 등과 같은 쾌락주의로의 흐름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 춤과 로큰롤음악에 도취되어 흥을 냈다.
기존적 가치관에서 볼 때는 새로운 젊은이의 이상주의는 퇴폐적인 요소를 다분히 띄고 있다. 2차대전후, 어려움을 모르고 물직적 풍요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 젊은들이 물질적 가치에 권태를 느껴서 였는지도 모른다.
극히 낭만적이며 극히 이상주의적인 이 반문화 정신은 물질이 풍요한 서양, 특히 미국에서가 아니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당장의 생존에 시달리고 절박하게 살아야하는 제3국가들, 특히 약소국·후진국의 젊은이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70년대 초 마침내 미국은 그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월남에서 모욕적인 패전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것은 무제한 한줄로만 생각됐던 미국의 힘, 그리고 세계를 지배해 왔던 서양의 사양길을 나타내는 역사적 징후로서 느껴졌다.
소련의 군사적 팽창이 해가 갈수록 느껴지고 워터게이트의 정치피동에서 정치도덕의 부패가 드러났고 이란 혁명후 대사관이 점령돼도 어쩔 수 없었던 미국의 처지에서 해가 갈수록 일본, 그리고 한국 대만 등 후진국으로부터 경제적 공세를 받게 되고 아랍권 세력의 확장,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그리고 최근에 와서 남미 몇 나라들의 공산화와 더불어 미국과 서양의 국제적 위치는 나날이 위축되고 걷잡을 수 없었던 실업자의 증가, 무역수지상의 적자현상, 인플레이션 등은 노래와 춤을 부르짖던 반문화적 이상주의의 허점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았다.
미국, 더 나아가서는 서양의 사양이 나날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고 그만큼 생존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반체제를 내걸고 근본적 혁명을 외치면서 공부대신 노래와 춤, 맥주와 마리화나, 섹스와 해수욕을 즐기고있는 동안 제3국 약소국들의 젊은이들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며 직장에 나와 열심히 일을 하게되자 무서운 경쟁의 상대자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제 미국학생들은 어떻게 하든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따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함을 느끼게됐다. 일류대학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신입생들이 의과대학원, 경영학대학원, 법과대학원을 지원하고 있으며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최근 인기가 있는 컴퓨터기술을 습득하려하게 됐음은 어쩔 수 없는 경제적 정치적 환경을 배경으로 충분히 납득된다. 냉철한 현실이 미국의 대학생 앞에 나타나 보인 것이다.
미국 대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어느덧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로 변해가고 있다. 60년대, 70년대 중· 고등학교에서 반체제라는 들뜬 기분에서 공부를 않고 허송하며 보낸 세월들이 반성되고 후회된다. 다시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현 체제의 테두리 속에서 생존의 길을 마련해야할 상황에 있다. 현 체제는 부정될 것이 아니라 보수돼야한다는 것이다.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비판을 하기보다는 적응의 길을 택한 오늘의 미국대학생들은 어떻게 보면 크게 성숙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딴 각도에서 볼 때 그만큼 젊음을 잃었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현상은 그만큼 보수적이며 이기적이며 물질주의 적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의미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축제를 벌인 듯한 부산한 캠퍼스의 분위기가 이제는 적막할 정도로 조용하다.
들뜨긴 했지만 역시 낭만적인데가 있었던 학생들은 어느덧 컴퓨터 앞에서 기계적으로 타산을 하는 실용적 애늙은이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학생들이 차차 정치·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게된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최근 대통령예선이 열을 띠고 있어도 전과는 달리 그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기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현재도 레바논 엘살바도르 등의 정치적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들고 나오는 학생운동은 없다. 「평화운동 「핵무기동결」을 싸고 다소의 학생이 참여하고있지만 그 수는 극히 적고 그 정열도 미지근하다.
학생들이 뒤늦게나마 다시 책을 읽고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학교의 규율을 지키게됐다는 사실은 본인들을 위해서나 미국이라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나 한편 낭만과 이상주의를 동댕이치고 눈앞의 실질적 개인의 이익만을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본인들을 생각해서나 국가의 먼 앞날을 위해서는 섭섭하며 경계해야할 현상인지도 모른다. 바람직한 것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서의 학생이 아니랴.
공부는 않고 지저분하고 혼란 속에 떠들썩했지만 그전 학생들은 어딘가 활기 넘치고 즐거워 보였다.
공부에 열중하고 깔끔하고 조용한 가운데 안정되어 보이나 오늘의 학생들은 어쩐지 침울하고 소심해 보인다. 정열과 지성을 겸한 젊은이만이 이상적 학생상이리라. <박이문(미 시먼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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