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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파일] "당신 아들 있어요" 20년 전 그녀가 편지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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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짐 자무시 감독의 신작 '브로큰 플라워'는 은근히 짓궂다. 20년 전에 헤어진 연인의 주소를 찾아내 어느날 갑자기 초인종을 누른다. 이런 생뚱맞은 설정이 로드무비 형식을 띤 이 영화의 간선도로다. 자무시 감독은 이 길을 달리면서 현재를 과거로, 또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 세월의 만남을 주선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뜬금없다. 여자와 방금 이별한 중년의 남자에게 분홍색 편지가 날아든다(사진). '당신에게 19세 된 아들이 있다'는 내용이다. 발신자도 없고, 주소도 없다. 20년 전의 여자라. 한창 때 별명이 '돈 주앙'이었던 돈 존스턴(빌 머리)에겐 딱히 떠오르는 여자가 없다. 고심 끝에 그는 다섯 명의 여인을 '용의자' 명단에 올린다. 그리고 그들의 현주소를 찾아내 길을 떠난다.

영화에서 다섯 명의 여인은 일종의 '간이역'이다. 추억을 향해 뒷걸음질치는 '돈 주앙' 열차가 바퀴를 멈추어야만 하는 정차역이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을 세월, 여인들도 '옛날의 그녀'가 아니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로라는 딸을 둔 미망인이 됐고, 변호사를 꿈꾸던 카르멘은 동물 심령술사가 돼 있다. 또 한때 히피였던 도라는 대단히 보수적인 부동산업자로 돌변해 있다.

분홍색 꽃다발을 들고 문 앞에서 '옛날의 그녀'를 고대하던 존스턴에게 그녀들은 나름의 배신감을 안긴다. 존스턴은 로라와 20년 만에 섹스를 하지만 페니는 욕설을 퍼부으며 그를 쫓아낸다. 또 마사를 찾았을 땐 그녀의 남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어색한 대화를 감당한다. 그는 어떤 이에겐 '흘러간 사람'이고, 또 어떤 이에겐 '지금도 흐르는 사람'이다. 꽃은 오래전에 부러졌지만 신음 소리는 지금도 새어나온다. 결국 존스턴은 자신의 과거와, 과거 속의 그녀들을 통해 지금의 자신을 돌아본다.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 삶이고, 그 역시 쓸쓸한 몸짓으로 흐름에 몸을 맡긴다. '가장 프랑스적인 미녀'란 찬사를 받는 줄리 델피와 '킹콩'(1976년작)의 히로인 제시카 랭, '캣우먼'의 프랜시스 콘로이, '나니아 연대기'에서 마녀 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 등 쟁쟁한 톱스타급 여배우들이 존스턴의 연인을 열연한다. 그야말로 5인 5색이다. 그들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존스턴이 한때 가졌던 욕망과 지향을 각자의 색채로 상징한다. 여기에 표정없는 표정으로 삶을 주시하는 빌 머리의 궁합이 묘한 매력을 빚어낸다.

자무시 감독은 84년 칸 영화제에서 '천국보다 낯선'으로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브로큰 플라워' 역시 올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자무시 감독은 "나는 관객들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장면을 찍는 게 좋다. 일종의 카오스 이론이다. 세상사도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분자나 감수성에 이끌려 흘러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마따나 열린 형식이라지만 갑작스러운 엔딩은 좀 당황스럽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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