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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 정신대|노수복 할머니 원한의 일대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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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내 이름은 여자정신대. 위안부 또는 「삐」라는 치욕스런 이름으로 불리는 「조오센진」이었다.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아 견디기 어려웠지만 나는 살고 싶었다. 마지막 고향연못가에서 나를 눈물로 떠나 보냈던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도 동생들도, 그리고 고향산천도 다시 보고 싶었다. 나는 살아야만했다.

<죽어 가는 동료들>
살기 위해선 모든 고난과 치욕과 고통을 참아야했다.
처음 얼 맛 동안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며칠동안 힘이 없어 비틀거리다가 감독자에게 넋이 나가도록 매를 맞았다.
군대병영에서 급식하는 식사를 억지로라도 먹기로 했다. 급식이라야 된장국밥으로 멀건 일본식 된장국에 밥을 말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될수록 매도 맞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려면 무조건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했다.
전쟁이 가열해 짐에 따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사들은 포악하기 이를 데 없었고 자칫 하면 그들의 총검에 찔려죽기 심상이었다. 무엇보다 건강이 중요했다. 우리 정신대 동료가운데 18세로 가장 나이가 어렸던 한 소녀는 제대로 먹지도 못한데다 일본군들의 시달림에 지쳐 숨을 거두기까지 했다. 그 소녀는 언제나 갈 때가 되면 『어머니』를 부르며 흐느껴 울기만 했다. 나는 동료 6명의 조장으로 뽑혔다.

<10세 소녀도 손대>
나의 성격이 비교적 활달하고 그네들의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장의 일은 더 큰 고통이었다.
정신대원들의 일 거수 일투족을 고해바치는 내부 첩자 노릇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대원들의 건강·급식·배급 및 내무반 생활을 간섭하는 시어머니 노릇도 해야했다.
고자질을 제때 하지 않았다 해서 뭇매를 맞기 일쑤였다. 그렇다하여 내가 다른 동료들이 하는 일을 한 가지라도 면제받는 「특전」따위는 없었다.
정신대로 끌려갔던 많은 여인들은 어떤 때는 하루에 60여명의 병정들을 맞아야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런 날은 의식도 없이 겨우 목숨만 붙어있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아침이 되어서야 의식을 차린다.
싱가포르에서 7∼8개월 지난 뒤 우리는 군용트럭에 실려 딴 지역으로 이동했다. 정신대는 소속부대의 이동에 따라 옮겨다녔다.
처음 옮긴 곳은 말레이지아 남쪽 끝 조호로바루 건너편의 우들랜드였고 이어 말레이반도를 거쳐 북상, 태국남부의 트랑라농에도 잠시 머물렀다.
그 무렵은 일본군이 점차 태국전선에서 승리, 방콕을 함락하고 나아가 버마까지 넘보던 태평양전쟁 중반기였다. 우리들은 전세에 따라 방콕부근의 칸차나부리까지 이동했다. 칸차나부리는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영·일군의 격전지였다.
1년 가까이 끈 오랜 이동에서 내가 본 전장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일본군의 잔인·잔혹성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일본군들은 진군도중 붙잡은 태국여인들, 심지어는 10여세 안팎의 어린 소녀를 못쓰게 하는가하면 여러 병정들이 어머니와 딸을 한자리에서 차례로 욕보이는 일까지 있었다.
버마에서는 일본군 장교들이 만행을 저지른 뒤 버마 여인들을 모두 죽였다고 들었다.
지옥의생활 1년여가 지난 어느 날 한 병영에서 군복차림의 조선여인 대여섯 명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너무 반가와 우리일행 여섯 명이 모두 우루루 달려갔다.
정작 이들과 맞닥뜨리자 우리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일본인 인솔자들은 소속이 틀리는 한국인들끼리 서로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함께 모여 도망갈 궁리를 할까봐 두려워했던 때문이었다.

<일군 드디어 패퇴>
동남아 전선을 떠돌기 벌써2년이 지난 45년 초 남태 전선에서였다. 일본군의 전세가 악화돼 후퇴가 거듭되었다.
전세가 불리 하자 일본군 병사들은 더욱 포악해졌다.
우리는 나날을 공포 속에서 살았다. 태국의 다른 정신대원들이 일본군에 의해 동굴 속에서 몰살됐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우리는 거의 실어증에 걸리다시피 했다.
급식이 나빠지더니 드디어 중단됐다. 굶주림과 공포가 엄습해왔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자고있던 침상에 살모사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앉아 나를 쳐다보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엉겁결에 돌멩이로 그 뱀을 쳐서 죽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고통으로 살겠다는 의지마저 약해져 왜 내가 물려죽지 않았나 하고 후회했다. 【핫차이(태국)=전종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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