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 '한·일 우정의 해' 보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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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左)과 다카시나 슈지 도쿄대 명예교수는 동서양의 문화를 견주고 전통과 현대를 비교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세 시간 남짓 세상 문화를 거침없이 논한 두 벗은 "한.일 관계도 꼭 우리 같았으면 좋겠다"고 서로 고개를 숙였다. 변선구 기자

한국과 일본은 2005년을 말 그대로 '다사다난'하게 보냈다. 반목과 교유, 갈등과 이해를 주고 받는 사이 한.일 우정의 해가 저물어간다. 두 나라 문화계의 원로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71.중앙일보 고문)과 다카시나 슈지 도쿄대 명예교수(73.오하라 미술관 관장)가 1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나 오랜 우정을 바탕으로 양국 문화를 논했다. 미술사학자인 다카시나 교수의 저서 '미의 사색가들'(김영순 옮김, 학고재 펴냄) 한국어판 출간 축하를 겸한 저녁 자리였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두 사람의 얘기는 밤이 이슥하도록 끝날 줄 몰랐다. [편집자]

이어령(이하 이)=닭의 해에 이어 개의 해가 오고 있습니다. 한국.중국.일본은 동물에 대한 공감을 나누고 있지요. 소나무나 대나무 같은 식물을 대하는 느낌과 태도도 다른 듯 같은 점이 많습니다.

다카시나 슈지(이하 다카시나)=제 한글판 책이 참 깔끔하고 아름답게 나왔어요. 일본은 아직 세로쓰기 인쇄를 하는 데 한국은 모두 가로쓰기군요.

이=한.중.일은 원래 띄어쓰기 없이 글을 썼는데 근대 이후 한국만 서구식으로 띄어쓰기를 좇아가네요. 사실 한국과 일본 관계를 생각하면 너무 재미있어요. 한국이 중국 문물을 일본에 전해주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 문물을 한국에 전해오고…, 전통은 한국이 더 빨리 버린 셈입니다.

다카시나=일본은 지금 '아날로그 파 모여라' 같은 반(反) 디지털 운동이랄까, 하는 것이 벌어지고 있어요. 아날로그로 돌아가자는 거지요. 글씨를 기계로 찍는 것과 손으로 쓰는 것은 굉장히 다르지요. 손으로 쓴 글씨에서는 쓴 사람의 호흡을 느껴요. 아날로그란 쉽게 말하면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것까지 느낀다는 겁니다. 그림을 볼 때도 눈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보고, 들을 때로 귀뿐 아니라 눈으로도 듣는다는 거지요.

이=한국말에도 '맥을 본다'든가, 오늘 술이 잘 듣는다 같은 표현이 있지요.

다카시나=서양은 만물을 다 도막으로 갈라서 마지막에 모두 시각으로 몰아줬어요. 그래서 현대에 와서 보는 것만 발달하게 됐지요. 후각은 더 분절할 수 없으니까 후각을 무시했고 결국 퇴화한 거고요. 향수는 역설적으로 잃어버린 후각을 되살리려는 보조 도구인 셈이죠.

이=재미있는 건 잘게 분절된 시각은 금방 잃어버리는데 분절을 거치지 않은 후각은 오래간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여인의 향기랄까.

다카시나=시각이 절대 우위에 놓이면서 영상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젊은 세대는 어릴 때부터 엄청난 양의 영상을 소비하며 삽니다. 훌륭한 작가에게 대량으로 퍼부어지는 영상은 어쨌든 좋은 것이라 할 수 있죠. 다만 그 시대의 걸출한 작가라면 영상을 소비하는 한편으로 전통에서 제 것을 찾아내 맥을 짚어주는 일이 중요하겠지요. 한국과 일본 젊은이 중에 뛰어난 작가가 많이 나올 가능성이 큰 셈이죠. 그런데 이 김치가 참 맛있네요.

이=갖은 양념을 한 소를 넓은 배춧잎에 싸서 담근 보쌈 김치입니다. 자, 이렇게 쭉 찢어서 소를 얹어 잡숴보세요. 밥과 찬을 넉넉히 해 길손까지 거둬 먹이는 식객(食客) 문화는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나라에 나그네는 있어도 여관은 없었어요. 그저 시 한 수 읊으면 밥값에 잠자리까지 인심이 후했죠.

다카시나=시 한 수 대신 한.일 우정의 해에 한마디 붙이렵니다. 올해 두 나라 사이에 참 여러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교과서 왜곡 문제 등 해묵은 논쟁거리는 여전합니다. 문화 교류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어두운 마음이 싹 달아납니다. 대중문화뿐 아니라 미술.음악.문학.학술 교류 등 예술 분야의 주고받음은 아주 잘 진행되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일본 언론이 참 이상한 겁니다. 정치적인 것만 물고 늘어져 두 나라 관계를 나쁘게 몰아가요. 왜 문화포럼 같은 활동을 안 쓰는지 안타깝습니다.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고 나누던 과거의 좋았던 관계가 살아나고 있어요. 옛날처럼 문화교류를 더 많이 폭넓게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바다에 비유하자면 정치는 파도와 거품에 불과하고, 문화는 깊은 해저의 골짜기와 산맥이라 할 수 있겠지요. 중국이 좀 위험해 보이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달라질 것이라 믿습니다. 이미 올림픽을 개최한 일본과 한국이 적극 베이징 올림픽을 지원하면 한.중.일 아시아 삼두마차는 잘 달릴 것이라 믿습니다. 삼국이 엇비슷하게 성공해야 우리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리=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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