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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그때도 '세계화 갈등' … 구한말 다시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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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9세기 말 이 땅의 지식인들이 당혹감 섞인 마음으로 음미해야했던 사상은 H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힘이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정글의 법칙을 내세운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사회진화론은 오늘 날의 세계화론.신자유주의를 연상시킨다. 1880년대 일본을 통해 낯선 용어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구한말 지도층이 대응책을 놓고 사분오열됐다면, 지금 우리들은 세계화.신자유주의를 놓고 몸살 앓는다. 구조는 같은 셈이다.

구한말 한반도는 제국주의적 질서 앞에 1차 개방에 직면했다. 100여년 뒤인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질서 앞에 2차 개방을 요구받고 있다. 사진은 1894년 갑신정변 직전에 찍은 민영익.유길준 등 개화파 인사들(左), 구한말 풍전등화의 한반도 상황을 비유한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의 삽화(中), 지난 해 6월 국내에서 일어난 세계화 반대 시위.

쌀 시장개방을 놓고 농민들은 거리로 몰려 나오고, 지식인들은 저 마다의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둘러 싼 이해 차이이자 입장차이다. 어떻게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둘러 싼 방법론 싸움이기도 하다. 100여년 전 위정척사를 주장한 유학자들이 성리학적 가치 옹호와 외세 배격을 외쳤다면, 지금도 그런 그룹이 존재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유사한 북한 김정일주의의 폐쇄주의 그룹이 그들이다.

반면 1960년대 근대화를 외쳤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성공한 애국계몽운동'혹은 '현대의 김옥균.서재필'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박정희가 국가권력 동원을 통해 거대한 성공을 거뒀다면 애국계몽운동과 김옥균.서재필 등은 여러가지 이유로 실패했을 뿐, 결국 이론적 지향은 같았다. 3공에 이론적 기반을 제시했던 철학자 박종홍, 역사학자 이선근은 김옥균과 함께 거사를 일으켰던 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갑신정변 주인공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른바 계몽적 지식인으로 함께 묶이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대중역사서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푸른역사)가 "책을 읽는 당신은 김옥균인가, 아니면 홍종우(김옥균 암살자)인가"를 묻는 것도 자연스럽다. 김옥균 암살사건은 개인적 원한 따위와 상관없이 대한제국 시기 역학관계와 열강 이해가 얽혀있는 핵심사안으로 본 것이다. 이때 급진적 개혁안을 제시한 김옥균은 세계화주의자.코스모폴리탄으로, 홍종우는 황제주의자.현실적 국제주의자로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

어쨌거나 근대사의 분수령인 갑오.을미 공간에 펼쳐지는 '소용돌이 속의 한반도'를 그중 입체적으로 분석한 책은 유영익(연세대 국제학대학원)교수의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일조각, 1998)이 꼽힌다. 한반도를 둘러싼 드라마는 갑오.을미 공간에서 벌어지지만, 그 이전인 1880년초부터 10여년은 일종의 소강상태. 약육강식.우승열패(優勝劣敗)의 대세 앞에 합의를 구하지 못한 국내외 세력이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지가 엄청 세밀하면서도 거시적이다.

주변 열강의 움직임 쪽에 초점을 맞춘 노작은 한양대 최문형 명예교수의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지식산업사, 2001). 이 책은 100여 년전 갑오.을미 공간이 제1차 개방의 국면이라면, 지금은 제2차 개방의 시기임을 암시해준다. 한국사의 좁은 지평을 뛰어넘어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구한말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선대가 국제 정황에 어두워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아픈 과거를 멀리서 조망해주는 효과가 뛰어나다.

가장 대중적 저작이면서 오늘과 과거를 함께 넘나들며 얘기하는 책은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허동현(경희대) 교수의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푸른역사, 2005)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오늘 우리 주변의 모습은 이렇다. 군사적 애국주의를 마다않는 네오콘의 미국, 동북공정에서 나타나듯 공산주의 이념 대신 중화민족주의를 선택한 중국, 독도를 넘보며 극우화가 고개를 쳐드는 일본, 여기에 국가주의가 유행인 러시아…. 누가 과연 우리의 적이고 친구인지,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100여년 전 선조들보다 현명하게 응전하고 있는지를 묻게 만든다. 당신은 홍종우인가 김옥균인가, 혹은 로칼리즘.글로벌리즘 사이의 어느 지점에 서있는가를 가늠해볼 수도 있다.

이밖의 저술로는 서울대 이태진 교수 등 9명이 쓴 '고종황제 역사청문회'(푸른역사, 2005)를 꼽아야 한다. 당시의 '한반도 CEO' 고종이 무능한 부패군주인가, 근대화를 모색하려했던 개명군주인가를 통해 근대화문제의 본질을 파헤친다. 동북아를 함께 보려는 저작으로는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역사비평사, 2003)가 있다. 부제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에서 보이듯 가시모토 미오 등 일본 역사학자들이 조선시대와 중국의 명.청 시대를 함께 보면서 사회문화사에 충실하다는 점이 미덕이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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