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람]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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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저는 대한민국에서 돈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살림살이를 다 맡고 있으니까요. 여러분도 용돈을 쓰기 전에 계획을 잘 세워야 그 돈이 알찹니다. 그리고 독립투사나 세계에 한국을 드높인 사람만이 애국자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서 세금 많이 내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도록 하는 사람들도 애국자지요."

이문열씨의 중편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실제 주인공인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이 지난 12일 스승의 날을 앞두고 일일교사로 중학교 3학년 교단에서 한 말이다. 李씨는 4학년 때 서울서 경남 밀양초등학교로 전학갔다.

朴장관은 4~6학년 내리 반장을 맡았으며 공부도 일등이고 학급도 모범적으로 운영해 李씨의 우상이 됐다. 초등학교 한 학급을 배경으로 권력의 속성을 심도있게 다뤄 호평을 받은 우화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모티프는 당시의 朴장관 모습에서 잡아낸 것이다.

朴장관과 李씨가 지난 22일 낮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둘은 분기마다 열리는 동창회 등을 통해 우의를 다져오고 있다.

*** 朴 "우린 찬밥도 나눴는데…"

▶박봉흠=자네의 작가성.천재성을 알아본 것은 누구보다 먼저 나야. 자네가 서울서 전학온 지 얼마 안돼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한 질문 생각나나. '지도상으로는 평양이 서울보다 위에 있는데도 서울 간다면 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간다고 하느냐'는 질문에 아무도 답 못하고 반장인 내 눈만 살피더라구.

사실 나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 때 자네가 일어나 '서울은 임금님이 계시니까 그 어디에서든지 올라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라고 대답한 거야. 그래 그때부터 자네가 천재라고 생각했지.

▶이문열=내가 원래 양반 아닌가. 양반이 임금에 대한 그런 도리도 모르면 안되지. 그래 40여년 후 반장이 아니라 선생님으로 교단에 서니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그 때의 우리들하고 지금의 학생들은 어떻게 다르던가.

▶박=우리들 때는 찬밥일지라도 나눠 먹고 무엇이든 같이 나눌 줄을 알았지 않은가.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우리 아이가 컴퓨터가 고장 나 숙제를 못해 이웃집 같은 반 아이들에게 가 좀 같이 하려다가 거절당하는 것을 보고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이기적이구나 하고 실감했지.

*** 李 "내것 챙기는데 익숙한 탓"

▶이=그래. 우리는 어릴 적 소유의 개념이 없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이리저리 듣고 배워 정보의 용량, 즉 아는 것은 많은데 그것이 삶에 대해 무엇인지를 적용할 줄도 모르는 것 같고. 왜 우리는 어릴 적 배운 것들을 진리인 양, 진정인 양 섬겼는데도 말이야.

▶박=학교에서 우리들은 지식이 곧 인성이 되는 교육을 받고 자랐지. 그런데 지금은 지식 따로 인간성 따로인 교육인 것 같아. 우리들 때는 가정 형편에 따라 형제 많고 공부 못하면 상급학교에도 진학시키지 않았는데 요즘은 교육비 지출을 그 어느 것보다 우선시하며 죽자 살자 교육을 시키는데도 그 교육이 과연 참된 인간을 키워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이=참, 자네 담배 끊었다더니 다시 담배를 또 시작했구먼. 요즘 일이 그렇게 힘드는가. 장관 일 하다보니 그렇게 스트레스가 쌓이는가. 전에 한번 자네에게 우리 고향 일을 부탁하는 말을 했다 혼쭐 난 기억도 있는데 자리가 더 높아지니 이런저런 일로 더욱 힘들겠지.

▶박=사실 말도 안되는 부탁이나 원칙을 벗어난 도움을 청하는 말들이 많이 들어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저런 연줄이 닿으면 다 된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아. 공직에 있다 보면 아는 사람들의 그런 착각이 꽤나 힘들게 만들지. 자네는 담배를 완전히 끊었나.

▶이=화 나고 스트레스 받으면 담배 생각이 들 때도 있지. 그러나 건강하게 오래 살아 남아 그런 이들에게 나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 안 피우지. 왜 요즘 우스갯소리로 '반(反)386세대'라는 말 있지 않은가. 1930년대에 태어났고 80년대에 잘 나갔던 60대는 구제불능이다는 말 말이야. 아직 우리는 50대지만 그 말이 언제 '반 495'로 내려올지도 모르지. 어쨌든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존재로 건강하게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박=요즘도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는가. 언론에서 이제 자네 이야기는 좀 뜸한 것 같은데.

▶이=작가는 일단 좋은 작품을 내놓고 할 말을 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네. 일간지와 인터넷에 작품을 연재하고 있지. 독자들의 호응을 받기 위해 온 힘을 바치고 있네. 내 작품, 내 글이 극우.보수라며 책을 불지르고 풍장.조장 등 온갖 장례를 치른 사람들에 대해 지난날 같은 직접 대응은 자제하려고 하네. 당분간 대 사회적 발언도 물론 안할 것이고.

(대화가 자연히 참여정부가 들어선 후 요즘 시국과 정치로 이어지면서도 둘은 그런 이야기들은 자제하려 했다. 특히 李씨는 1백일도 안됐고 앞길이 창창한 참여정부에 대해선 좀더 두고 보다 올 연말쯤 돼서나 가타부타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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