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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세대의 우울한 청춘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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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저축해둔 NT(대만 화폐단위) 50만달러를 다 쓰는 날 그를 떠날거야."

대만 영화 '밀레니엄 맘보'의 여주인공 비키(수치.舒琪)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남자 친구 하오하오(투안 춘하오)와 동거한다. 비키는 백수인 하오하오를 먹여살리기 위해 호스티스 노릇을 한다.

하오하오는 고마워하기는커녕 늘 비키를 질투하고 의심한다. 그녀는 의처증 남자친구로 대변되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일탈이 아닌 완전한 새 출발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대만 뉴웨이브의 거장 허우샤오셴(候孝賢) 감독의 '밀레니엄 맘보'는 10년 전 자신의 20대를 되돌아보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10년 전 그 때란 공교롭게도 또다른 세기가 시작된다는 밀레니엄. 지구촌이 알 수 없는 희망에 가슴 두근거리던 2001년이다. 1백년마다 인류가 맞는 희년(禧年)이라지만 집단적인 떠들썩함이 개개인의 깊은 속까지 채워주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한 것이다.

영화는 비키가 긴 터널 안을 천천히 걸어가는 아름다운 도입부를 통해 이렇듯 젊음에 희망이란 불안의 다른 이름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 속에서 잠깐 비치는 영국의 테크노 그룹 아트 오브 노이즈의 LP처럼 몽환적인 테크노 음악과 손으로 들고 찍는 핸드 헬드 카메라는 이런 불안정하고 들뜬 분위기를 부추긴다. 비키의 방 역시 화려한 색깔로 채워져 있지만 거기서 그려지는 그녀의 삶은 맞고 싶으냐는 남자 친구의 위협만큼이나 비루하다.

이 영화는 1986년 '비정성시'이후 두번째로 국내에 소개되는 허우샤오셴 감독의 작품이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현대를 위한 3부작'의 첫 편이다.

90년대 중반 한국의 젊은 관객을 달뜨게 했던 왕자웨이(王家衛)의 빠르고 감각적인 영상과 문법에 익숙한 이들에게 그의 여전히 느린 템포는 다소 버거울 수도 있겠다. 전지현을 연상시키는 탐스러운 긴 머리가 매혹적인 수치가 그러한 단점을 가리려 고군분투하긴 하지만 말이다. 30일 서울 시네코아.엠파크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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