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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무기의 확산이 근대 국가 탄생의 원동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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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호 20면

그림 1 장 드 와브랭이 묘사한 1340년대 전투 장면, 15세기 말 작품. 총과 대포로 성을 공격하는 군사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 1은 15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서 과거 전쟁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긴 장 드 와브랭(Jean de Wavrin)의 ‘영국연대기(Chroniques d’Angleterre)’에 등장한다. 200여 년 전에 있었던 백년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 도시를 공략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낯선 느낌이 난다. 건물은 낯익은 중세 유럽 성채의 모습인데, 병사들의 무기는 활이나 창이 아니라 화약무기다. 그림의 배경인 14세기 중반은 유럽에서 처음으로 화약무기가 전투에 사용된 시기였다.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23> 무기혁명과 국가재정 시스템

그림 2 화공무기를 든 악마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석가모니, 10세기 둔황 석굴벽화(부분).

화약무기는 중국에서 유래했다. 그림 2에서 초기 화약무기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10세기 둔황 석굴에 그려진 이 벽화에는 석가모니가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난 마라(魔羅)로부터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장면이 그려있다. 석가모니의 오른편 위쪽으로 화창(火槍)을 들거나 수류탄처럼 보이는 화공무기를 손에 든 악마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 탱화는 화약무기를 묘사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여겨진다.

12세기 송나라 때 화약무기 사용
중국에서 실제로 화약무기가 전쟁터에서 사용된 것은 12세기 송나라 때였다. 이후 화약무기는 연이은 왕조들에 의해 더욱 발달했다. 초기에는 화약이 발화를 주목적으로 사용됐으나 점차 폭발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화약무기도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개발됐다. 화약무기의 잠재력은 곧 다른 국가들에게 알려졌다. 13세기 몽골제국이 서아시아 정벌을 하는 과정에서 화약과 화기가 이슬람세계에 알려진 것으로 보이며, 다시 유럽은 이슬람을 통해 화약무기의 위력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화약무기 개발에 힘을 쏟으면서 마침내 14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가 전투를 벌이는 현장에 그림 1과 같이 총포가 등장하게 됐다.

초기 화약무기는 파괴력이 변변치 않았고 사용하기도 불편했다. 때론 무기를 다루는 병사가 사고를 내기도 했다. 신기하지만 효과는 의심스런 화약무기가 세계사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군사혁명(Military Revolution·무기혁명)’으로 이어지게 될 것을 당시에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화약무기 성능이 향상되자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된 것은 기사였다. 중세 군사력의 상징이었던 마상 기사는 총포를 이용한 공격에 무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기사의 몰락은 중세 유럽사회의 근간이었던 봉건제가 무너지는 걸 의미했다. 전투력이 없는 기사를 가신으로 임명하고 봉토를 내줄 주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화약무기를 다룰 줄 아는 병사들을 대규모로 보유하는 것이 최상의 군사전략이 되었다.

성채의 구조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돌담을 높이 쌓은 성채는 대포 공격으로 붕괴하기 쉬웠고, 둥근 능보는 아래쪽으로 바짝 접근한 적군에 대응하기 어려운 사각(死角)의 문제가 있었다. 화약무기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흙벽을 비스듬한 각도로 두텁게 다져 누벽을 세우고, 능보를 뾰족하게 각진 형태로 지어 근접한 적군을 다른 능보에서 직선화기로 공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성채 곳곳에 작은 구멍을 내어 엄폐된 채로 공격을 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새로운 요새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능보 개수만큼의 꼭짓점을 가진 별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이른바 성형요새(星形要塞, star fort)의 등장이다.

그림 3 베네치아 근교 팔마노바 성채 지도, 17세기.

이상적인 성형요새는 중심점을 기준으로 완벽히 점대칭인 별모양이지만, 요새가 위치한 지역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된 형태로 건설되었다. 이상적인 요새의 사례로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교의 팔마노바 성채를 들 수 있다. 1593년 베네치아의 건축가 빈첸초 스카모치(Vincenzo Scamozzi)는 새로운 도시의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그림 3이 보여주듯이 도시를 감싸는 성채가 정구각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고 꼭짓점마다 각진 능보가 돌출한 형태였다. 이 성채는 평탄한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다른 성채들과는 달리 정구각형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무기혁명이 야기한 이런 변화들은 곧 재정 확충의 필요성을 낳았다. 돈이 부족하면 성능이 향상된 화기를 개발할 수도, 대규모의 상비군을 고용할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다. 상비군을 훈련시켜 일사불란하게 화기를 사용하게 할 수도, 견고한 요새를 건축할 수도 없었다. 반대로 돈이 있으면 군사력이 강해졌다. 주변 세력을 흡수해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대다수의 영주들은 설자리를 잃었고, 대신에 대규모 영토를 단일 권력이 통치하는 국가가 만들어졌다. 봉건제 질서를 무너뜨리고 중앙집권화한 근대적 국가체제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바로 무기혁명이었다.

무기혁명은 수세기에 걸쳐 진화를 거듭하였다. 14세기에 보병의 전투력이 크게 인정받은 데 이어서 15세기에는 포병부대가 군사력의 중핵으로 떠올랐다. 16세기에는 요새 건설의 혁신과 소총부대의 밀집대형전술 도입이 중요시되었다. 마지막으로 17~18세기에는 각국이 이렇게 개혁된 군대를 대규모로 확충하고자 경쟁을 벌였다. 여기에는 병참시스템을 강화하고 행정체계를 완비하는 작업이 동반되었다.

무기혁명의 영향은 가히 범세계적이었다.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전투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적 변수로 작용했다. 1453년 오스만제국 군대가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릴 때에도, 1490년대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군대가 이슬람 최후의 보루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킬 때에도 개량된 화기가 큰 역할을 했다. 1610년대 이후 변방국가 스웨덴이 군사강국으로 등장한 배경도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 인도의 무굴제국도 군사개혁 덕분에 지방 세력들을 누르고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도 변화의 흐름에서 빗겨나 있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1560~80년대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각각 소총부대와 야포부대를 창설해서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중국에서는 1630년대에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가 포병을 양성해 대륙장악의 기반을 마련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소총부대 창설
어느 국가가 강대국이 되느냐는 무기혁명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무기혁명 달성을 좌우하는 핵심 열쇠는 재정개혁에 있었다, 특히 유럽이 신항로 개척에 성공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고 중상주의 시대를 개막하자 해군력의 중요성이 급속히 커졌다. 성능 좋은 대포를 장착하고 잘 훈련된 수병들을 갖춘 함대를 대규모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자금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세금 징수를 늘리거나, 은행에서 차입을 하거나,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달리 말하면, 조세제도와 금융제도를 잘 갖춘 국가만이 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과거의 강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힘을 잃고 신흥 강자 네덜란드와 영국이 떠오르게 된 것이 바로 이 차이 때문이었다. 특히 영국은 국채발행을 통해 전비를 마련하는 새로운 제도를 개발했다. 이 창의적 제도에 힘입어 영국은 중상주의 시기 국제적 무력 대결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최초로 맞이하게 되었다. 강대국이 되려면 무기혁명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재정과 금융이 발달해야만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게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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