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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임금 인상 통한 경기침체 극복이 가능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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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종윤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언급하고 한국은행에서도 시인할 정도로 한국 경제는 불황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불황 극복의 일환으로 ‘임금 인상’이라는 단어가 경제부총리 입에서 나왔다. 불황 문제에 올바르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 한국 경제에 왜 불황이 발생했는가 하는 원인 규명이 우선돼야 한다. 지금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들이 자국 통화 팽창을 통해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불황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세계 경제는 왜 이러한 불황에 빠지게 됐는가? 그것은 1980년대 이후 금융 자율화의 바람을 타고 등장한 뉴이코노미, 즉 주주자본주의의 출현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거대 기업들의 사실상의 오너가 된 투자은행들은 자신의 수익 극대화를 위해 기업에 이사를 파견해 기업 경영자들에게 주가를 높일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에 따라 기업 경영자들은 불요불급한 인적·물적 자원을 퇴출시킴으로써 기업의 수익을 높이고 주가를 높인다. 이러한 방식은 국민 경제의 분배구조를 양극화한다. 요컨대 주주와 소수의 각 분야 전문가들은 고소득화되고, 다수의 단순 노동자는 퇴출되거나 비정규직 형태가 돼 저소득화된다.

 2008년 발생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저(低)기술 노동자 계층의 퇴출과 저소득화에 따른 대출 상환능력의 악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뉴이코노미에 따른 소득 양극화의 전개는 노동분배율을 크게 하락시키고, 이에 따라 전체 수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개인소비율을 크게 떨어뜨려 결국 수요 부족에 따른 경기침체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흐름을 세계 대공황의 도래로 파악한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재빨리 양적완화라는 미증유의 정책으로 대처했다. 미국의 이러한 흐름을 지켜본 일본도 당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라카와 일본은행 총재를 사퇴시키면서까지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을 채택했다. 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의 목표는 통화량 증가를 통한 내수 확대는 물론 일본 엔화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일본 상품의 수출경쟁력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한국 경제는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로 들어가면서 철저한 뉴이코노미적 구조조정을 당했다. 해외 주주의 주요 기업 점령은 기업의 경영방식을 철저하게 이익을 극대화하고 주주 이익을 최우선하는 방식으로 바꿔 놓았다. 기업 경영의 이익을 높이고 주가를 높이는 과정에서 대량의 정규직 종업원이 퇴출돼 직장을 잃거나 비정규직이 됨으로써 한국 경제는 구조적 내수 부족상태가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경제에 더욱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엔저(円低)다. 한·일 간 산업구조의 유사성으로 인해 이미 95년 1달러 79엔에서 97년 1달러 120엔대로 되는 과정에서 한국 경제가 큰 폭의 경상수지 적자를 경험한 바 있다. 그 결과 외환위기를 당했던 것처럼 일본의 엔저는 한국 상품의 국제경쟁력을 급속히 하락시킨다. 현재 외견상으로는 수출액이 수입액보다 많아 우리의 무역수지가 흑자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그 밑에는 엔저에 대응하기 위한 출혈적 수출의 성격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따라서 세계적 불황에다 엔저에 따른 경영 압박이 우리 기업들의 경영구조를 취약하게 만들고, 그 결과가 한국의 경기 불황으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불황의 극복 방식도 이러한 성격에 적합해야 한다.

 최근 정책 당국은 내수 부진을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기업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적 불황이 초래된 주요 원인으로 주주 이익의 극대화에 따른 노동분배율의 하락을 들 수 있으므로 노동분배율의 상승을 가져올 수 있는 임금 인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경우 엔저로 인해 기업 경영이 극도로 압박받고 있는 상황이 다. 나는 그 해법으로서 다음의 정책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도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양적완화를 추진해야 한다. 단순히 이자율 인하에 그칠 게 아니라 원화가치를 확실히 낮출 수 있는 수준까지 양적완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국 기업들도 경영 압박을 덜 받게 되므로 그만큼 임금 인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일본도 엔저를 유도해 기업 이익을 높인 뒤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예비취업자에 대한 체계적인 기능교육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결국 노동생산성을 높여 기업의 임금 인상이 경영 압박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막아 줄 것이다. 기업들이 현장교육 비용을 줄이기 위해 경력직 사원만 채용하고 무경력 신입사원 채용을 기피하고 있어 장래의 기술 단절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국가가 그 갭(gap)을 메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불황상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이다. 불황의 성격에 적합한 대응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이종윤 한일경제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