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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일본] 야쿠자 합병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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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15일 오후 4시 도쿄 신주쿠(新宿)의 유흥가인 가부키초(歌舞伎町)의 한 레스토랑.

검은 양복 차림에 머리를 짧게 깎은 다부진 체격의 사나이 30여명이 검은색 벤츠 등 고급 외제차에서 내려 차례로 가게로 들어섰다.

이날 레스토랑은 오후 1시부터 아예 다른 손님은 받지 않았다. 일본 최대의 야쿠자(조직폭력단)조직인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산하 도쿄.간토(關東)지방 중간 보스급들의 정기 회동이 여기서 열리고 있었다. 도쿄 외곽의 군소 야쿠자 조직을 산하 조직으로 받아들일지가 이날 회동의 주요 안건이었다.

요즘 대형 야쿠자 조직의 회동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메뉴가 군소 야쿠자 조직의 인수 문제라는 게 일본 경시청 관계자의 이야기다.

10년 넘게 드리운 경기불황이 일본 내 야쿠자 조직의 판도마저 바꿔놓고 있다.

일본 경시청 조직범죄대책본부는 최근 "야쿠자 조직들의 자금줄 역할을 해왔던 환락.유흥업소들이 경기불황으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야쿠자 조직 간 인수.합병(M&A)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중소 야쿠자 조직들은 자신의 뒤를 확실하게 봐줄 수 있는 3대 조직, 즉 야마구치구미.스미요시카이(住吉會).이나가와카이(稻川會) 밑으로 들어가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서로 합병하는 추세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경시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도쿄 내 야쿠자 조직원 수는 1만6천6백명으로 10년 전인 1992년의 1만6천4백명에 비해 별 변화는 없으나 3대 조직이 차지하는 비중은 92년 42%에서 지난해 말 55%로 크게 늘었다.

대형 야쿠자 조직들이 덩치를 키우고, 파워가 더욱 세지면서 세력 간 다툼도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도쿄의 대표적인 유흥업소 밀집지역인 가부키초를 관할하다 해체한 '니비키카이(ニ率會)'가 대표적인 예다.

이 조직은 가부키초를 찾는 유흥업소 고객이 줄어들면서 조직 유지가 힘들어지자 일본내 '넘버 2'인 스미요시카이 밑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스미요시카이와 경쟁 관계에 있는 '넘버 3' 이나가와카이가 스미요시카이의 중간 보스를 급습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 양 조직은 니비키카이의 야쿠자를 50대 50의 비율로 흡수하는 절충안에 합의했다. 한솥밥을 먹던 야쿠자들이 졸지에 반반으로 나뉘어 적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원래 오사카(大阪) 등 간사이(關西)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야마구치구미가 최근 도쿄 등 수도권의 중소 야쿠자 조직들을 속속 품안에 끌어들이면서 파벌 간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다.

오사카 등 간사이 지방의 경기가 도쿄에 비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어 자금확보를 위해선 도쿄 진출이 불가피하다는 게 야마구치구미의 판단이다.

지난해 말 야마구치구미의 도쿄지역 책임자가 대로에서 총기에 맞아 숨진 것을 비롯, 최근 연이어 도쿄 일대 유흥가에서 총기 사고가 발생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야마구치구미의 확장 전략과 관련이 있다는 게 경시청의 분석이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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