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햇볕과 보안은 별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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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덴슈타트'(영웅의 도시) 라이프치히!

1989년 동유럽에서 소비에트 체제가 하나씩 무너져가는 '민주화의 도미노'현상이 일어났을 때 동독에서는 라이프치히에서 매주 계속되던 월요 시위가 공산당 독재정권의 붕괴와 동.서독 통일의 기폭제가 되었다.

'헬덴슈타트'란 칭호가 나온 배경이다. 통일 후 라이프치히시 중심부에 '현대사 포럼'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역사박물관으로는 콜 총리 때 본에 개관한 그것에 이어 두번째가 되지 않나 생각된다.

*** 독일도 통일 직전 간첩 늘어

지난 봄 그곳을 찾았을 때 마침 '어둠 속의 결투'(Duell im Dunkel)라는 독일 분단시대의 간첩전에 관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 흥미롭게 봤다.

옛 동독 간첩조직(국가보안부=속칭 '슈타지')의 특징이라면 그 기구의 방대함과 조직의 일관성이다. 우리나라에선 그 이름조차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등으로 자주 바뀌고 그 책임자는 한 대통령의 임기 중에도 수시로 교체되는 걸 보아온 눈에는 이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통일 후 이른바 '슈타지 문서'로 세계적 악명을 떨친 옛 동독 국가보안부의 에리히 밀케 장관은 1957년부터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89년까지 32년을 그 자리에 있었고, 그 밑에 대외 간첩활동의 총책을 맡은 마르쿠스 볼프도 53년부터 86년까지 33년이나 자리를 지켰다.

슈타지의 활동은 크게 국내 사찰활동과 대외 간첩활동으로 나뉜다. 전자에는 9만1천명의 전담요원과 18만명의 '비공식 협력자'(IM으로 약칭되는 슈타지의 은밀한 '끄나풀')가 소속돼 있고 후자를 위해서는 5천명의 전담요원과 약 1만7천명의 IM이 활동해온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들에게 특히 심상치 않은 사실은 동독의 서독에 대한 간첩활동은 '동방정책'의 추진으로 동.서독의 상호 승인과 상호 교류가 궤도에 오른 70년대에서 80년대 말에 이르는 기간에 오히려 더욱 확대.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동방정책의 기수 빌리 브란트 총리를 실각시킨 것도 바로 그의 측근으로까지 기어올라온 동독 간첩 기욤므였다.

슈타지의 인사기록 카드는 통일 직전 소각된 걸로 알려졌으나 90년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그 복사본을 입수해 보관하고 있다던가. 그러나 그 내용은 비밀에 부쳐진 채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만 통일 이전 슈타지의 끄나풀로 서독에서 활약하던 IM의 수는 줄잡아 2만 내지 3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는 서독의 각 정당에 침투해 활약했던 간첩 수가 1백20명.

그중에는 8명의 연방 국회의원과 2명의 유럽의회 의원도 끼어 있다. 전 IM의 진술에 따르면 서독의 10만 전화선이 감청대상이 되고 있었고 연방 대통령을 비롯해 연방 정부의 모든 장관의 카폰까지 도청되었다는 것이다.

*** '고영구의 국정원' 앞날 궁금

불길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것은 슈타지가 과거 서독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항의 운동들, 특히 학생시위나 반전 평화시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했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시위운동은 슈타지가 서독에서 새로운 IM을 충원하는 온상으로 이용해 왔다고 밝혀지고 있다.

물론 위와 같은 슈타지의 활동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나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요, 그건 알 수도 없다. 분명한 것은 국가 권력이 스스로 '보안'을 추구하는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옛 동독의 슈타지와 같은 조직과 활동이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특히 정치이념적으로 대립.대치하고 있는 분단국가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햇볕정책을 추진한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국정원이 적발, 공개한 간첩사건이 단 한건도 없었다"고 전 안기부 차장이 밝히고 있다(중앙일보 4월 12일자 칼럼). 고영구 원장의 새 국정원이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崔禎鎬(울산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