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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교양] '일그러진 근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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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일그러진 근대/박지향 지음, 푸른역사, 1만3천원

영국사를 전공한 박지향(50.서울대 서양사학과)교수의 창끝은 한국 사학계의 심장을 겨눈다.

국권 상실과 뒤이은 분단과 전쟁, 실패로 점철된 역사에 대해 "지정학적 요인이니, 냉전체제니 하는 여러 핑계를 대며 '우리 탓'을 인정하지 않으려 꾀를 부려왔다"는 것이다. 한 세기 전 실패의 역사에서 우리 몫의 책임 찾기에 소홀했던 한국 사학계에 뼈아픈 일침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수탈이 우리의 주체적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한 세기 전 실패의 역사에 대한 우리 몫의 책임을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일본의 침략성을 부각시키는 것만으로 한 세기 전 참담한 실패의 역사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는 없기에 필자의 거침없는 필치는 읽는 이의 가슴을 휘젓는다.

'1백년 전 영국이 평가한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이란 이 책의 부제가 웅변하듯 비교사적 방법론도 신선하다. "1백년 전 영국인들이 우리에게 던진 말에 발끈하지 말고 그 말을 음미하는 지혜를 가져보자.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려면 비록 비뚤게 보이는 거울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타자와 자기, 백인과 비백인, 문명과 야만, 진보와 정체'같은 이항 대립의 눈으로 낮추어본 일그러진 모습이라도 책임 회피의 중병을 치유하는데 보탬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멸망한 민족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드레이크의 말도 비수가 따로없다.

동양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뽐내던 비숍도 남성 중심사회에서는 그 존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타자'였음을 밝히는 세밀한 분석이 돋보인다.

남성성과 여성성, 즉 커즌과 비숍과 같은 관찰자의 성차(gender)가 그들이 남긴 식민주의의 담론에 어떠한 편차를 보이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낸 것도 이 책의 백미다. 문자로 표현되기 어려운 틈새를 메워주는 풍성한 삽화와 사진도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일과 같다"는 영국 더 타임스지의 조롱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세기 전 영국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부정적인 한국의 이미지는 오늘까지도 남아 있기에 그 뿌리를 찾는 작업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작업이다.

오늘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기에는 생경하고 곤혹스러운 영국이라는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통해 실패한 과거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충돌과 대결을 넘어 더불어 사는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메시지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하나 의문이 남는다. 우리의 반성의 준거가 될 만큼 '영원히 클 수 없는 어린아이'인 한국인의 국가 운영 능력을 부정하고 '백인이 되어 가는 사람들'인 일본인의 한국 지배의 길을 터주고 지지했던 영국인 심판관들이 내린 판정은 과연 공정했을까?

'한국은 없다'와 '일본은 있다'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들의 판정이 아누비스(Anubis)가 쓰던 정의의 저울처럼 정확할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국인들이 남긴 한국에 대한 부정적 기록의 이면에 영.일동맹으로 상징되는 영.일 두 나라 사이의 이해의 유착과 한국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이 펼친 선전활동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구제기(反求諸己)와 결자해지(結者解之)가 함께 할 때라야, 필자가 말하는 참다운 더불어 살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허동현<경희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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