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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에 속박되지 않아야 진정한 수퍼 시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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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회생활은 대부분 명함 교환 의식에서 시작된다. 명함지갑을 꺼내 공손하게 명함을 건네면 상대방으로부터도 “잘 부탁 합니다”라는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명함이 오기 마련이다. 등가교환(等價交換)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등가교환이란 상품의 가치와 가격이 일치하는 교환이란 뜻인데, 이 경우 경제적 의미가 아닌 감성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회사 퇴직 후 명함 없이 다녔다. 엄정하게 말하면 ‘기브 앤드 테이크(Give & Take)’의 관행적 룰에서 벗어나 부등가교환을 해온 셈이다. 처음 만나는 상대들은 자신이 뭔가 건넸는데 이쪽에서는 빈손이니 손해 본 표정이 역력했다. 공정한 거래가 아니었던 것이다.

명함이 없으면 흡사 사회적으로 거세된 존재로 취급받기도 한다. 오죽하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녀석’이라는 표현까지 있을까. 상대방에 비해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상태, 초라한 현재를 담은 말이다. 나는 말 그대로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실상은 1인뿐인 연구소 명함이라도 새겨 갖고 다니라는 충고도 들었지만 나는 낯간지러워 1년 반 동안 그냥 다녔다. 명함 없는 시기를 살아보아야 진정한 인생을 알 수 있다. 화장기를 걷어낸 민낯으로서의 자기 얼굴도 만나게 된다.

명함을 대하는 데 있어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큰 것 같다. 서양인들은 상대가 멀리 있을 경우 명함을 탁자에 휙 던져주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한국의 파트너는 모욕당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반면에 서양인들에게 명함은 단지 연락처를 적어놓은 하나의 종이일 뿐이다.

그들은 공적인 모임 아니면 사적인 자리에서 명함을 주고받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필요하면 그냥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한국 사회는 사적인 모임조차 명함을 교환하는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문화의 차이기도 하지만 사회에서 명함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명함에 대해 한국보다 더 경건한 의식절차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일본인들이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거룩한 리추얼(ritual)이라 부르는 편이 더 낫다. 마치 종교의식처럼 두 손으로 경건하게 명함을 받아들고 혹시 명함에 커피라도 묻을세라 조심을 해가며 소중하게 챙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한류 콘텐츠 비즈니스를 위해 일본의 방송사 혹은 엔터테인먼트 회사 임원들과 교류가 잦았는데, 그들은 식사자리에서 나의 음식메뉴와 술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명함에 연필로 조심스레 나와 관련된 특징을 상세히 기록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명함에 더 집착하는 시기는 아마도 중년이 아닌가 한다. 특히 자녀들의 혼사를 앞둔 때에는 더 예민해진다. “그래, 사돈은 뭐하십니까?”라는 저쪽의 질문에 밀리고 싶지 않아서 무리해서라도 허세를 부린다. 사돈 쪽에 비해 하객이 적으면 어떻게 하나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다. 자녀의 결혼식은 부모의 사회적 성공을 과시하는 기회이고, 부모의 장례식은 자식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시간인 듯싶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절대로 못 참는다. 2막 인생을 결정할 때 연봉은 양보할 수 있지만 명함의 타이틀만큼은 고집을 부리는 이유다. 한번 사장이면 영원한 사장이다. 본부장,국장 이렇게 한번 올라간 타이틀과 직함은 내려오는 법이 없다. 과거의 직함보다 조금 낮은 자리를 제안하면 무시당했다고 속상해한다.

죽겠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무리해서라도 그 타이틀에 합당한 축의금 봉투를 내는 사람들이 한국의 중년들이다. 이런 명함사회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사람들이 바로 사기꾼들이다. 그럴듯한 명함과 타이틀로 유혹하며 퇴직금과 집 담보물을 노리고 있는데도 눈뜨고 당하고 있다. 명함 때문이다. 제 2의 인생에서 최대 걸림돌은 명함이다.

최근 받은 명함 한 장은 그런 점에서 신선했다. 이름 앞에 ‘농부’라는 단 두 글자만 쓰여 있었으니까. 아주 당당한 명함이었다. 그 명함의 주인공은 원래 서울 유명 대학병원 의사다. 그는 언젠가부터 주말마다 수도권에 있는 밭으로 달려가더니 최근에는 굴삭기 배우는 자격증까지 획득하고 농사와 관련된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해내고 있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노동의 즐거움과 땀의 미학을 새롭게 발견하는 중이라고 했다.

학창시절 성적순으로 의대를 선택했지만, 이제 그는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다고 들떠 있었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지쳤고 이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했다. 나이 들어 뭔가 배우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는 어딘가 광채가 흘러나왔다.

몇 년 전 프랑스 남부 도시 앙티브의 피카소 박물관에서 보았던 글귀가 떠오른다. 앙티브는 니스와 칸에 인접한 작은 바닷가 도시로 피카소가 장년에 작품인생을 보낸 곳이다.

“사람들이 자서전을 쓰듯 나는 그림을 그린다. 자네는 단 한번이라도 완성된 그림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이든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다. 만약 자네가 이제는 완성했다고 중얼거렸다면 이미 끝장이다. 작품을 완성했다고 하는 속단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그렇다. 이 말속에 수퍼 시니어 정신이 들어있다. 평생 현역 정신이다. 잘 아는 것처럼 피카소는 과거의 타이틀과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늘 변신을 시도했다. 피카소가 글로벌 수퍼 시니어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얼마 전 내게도 새로운 명함이 생겼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보다 더 많이 배우는 것은 오히려 내 쪽이다. 시대의 흐름인 양방향 학습을 시도한 덕분이다. 중년의 나이에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가르치며 배우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이제 내 명함에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명함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의 성공과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명함들은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 않던가. 그 명함의 수식어가 없어지는 즉시 효용가치도 사라진다.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명함은 1회용인 것이다.

명함에 속박되지 않아야 수퍼 시니어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수퍼 시니어가 아닐까. 명함의 전성기야 이미 지났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인생이란 위대한 작품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손관승 세한대 교수(전 iMBC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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