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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광장] 낡은 진보, 낡은 보수는 가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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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 38면

광복 70주년이다. 일제 패망으로 갑자기 찾아온 광복은 식민통치의 종언이었지만 동시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식민지 아픔이 아물지도 않은 상황에서 질곡의 역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쟁과 분단, 쿠데타와 독재, 반공과 반독재 투쟁, 그리고 민주화와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힘겨운 역사는 국민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대한민국을 ‘보수’와 ‘진보’로 갈라놓았다. 21세기인 오늘도 양 진영은 각자의 참호 속에서 상대방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 복지와 증세 논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주요 사건마다 다툼은 반복된다. 지루한 공방은 끝나지 않고 원한만 쌓여 간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다”는 괴테의 말처럼 진보와 보수는 낡은 회색 이론을 버리고 현실 세계의 생명력을 얻어야 한다.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이론이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모두 한계에 부딪혔다. 계급혁명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반복적인 공황과 경제 위기를 거치며 한 세기 만에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 진화하였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양 진영은 아직도 낡은 회색의 이론 틀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 하고 있다.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거나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 양 진영의 논리들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적대적이다. 20세기 대부분의 전쟁과 테러는 ‘나만 옳다’는 이론의 배타성과 폭력성에 기인한다. 자본주의·공산주의·제국주의·민족주의 모두 마찬가지다. 적대적 투쟁관이 20세기 모든 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적대적 투쟁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보복의 악순환에 빠져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결코 지속적인 경쟁의 원리가 될 수 없다. 20세기 회색의 낡은 이론을 극복하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적대적인 역사관을 극복하고, 우리가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의 나무는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경쟁과 협력이라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진보와 보수의 모든 핵심적 가치는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연대와 협력,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이 진보의 핵심 가치이고 개인의 자기 책임성을 강조하는 것이 보수 논리의 바탕이다.

진보가 말하는 ‘더불어 사는 삶’이나, 보수가 지키고 싶은 ‘개인의 자기 책임성’이나 모두 선택의 문제이다. 양쪽 모두 선도, 악도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일 뿐이다. 따라서 공존할 수 있다. 21세기 진보와 보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존에 합의하면 경쟁은 생산적이 될 수 있다. 보수와 진보는 저마다 20세기에 주어진 소임을 다했고, 각자의 능력을 발휘했다. 물론 허물도 있다. 그러나 과(過)가 있다고 공(功)의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이다.

이제 21세기에 진보와 보수가 수행해야 할 새로운 경쟁은 민주주의라는 OS(운영체제)를 고도화시키는 것이다. 컴퓨터의 윈도우, 스마트폰의 안드로이드와 iOS처럼 국가도 운영체제를 가지고 있다. 현재까지 인류가 고안한 가장 발전된 국가 운영시스템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역량에 따라 국가의 효율성과 능력이 결정된다. 보수와 진보의 미래 경쟁은 바로 민주주의 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경쟁이어야 한다. 발전된 민주주의 시스템을 이용해 밀려드는 시대적 과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내야 한다. 이미 21세기도 14년이 지났다. 양 진영으로 갈라져 싸우는 새 대한민국에 폭풍이 들이치고 있다. 양극화, 저출산·고령화, 성장 전략 부재와 복지문제, G2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 분단 상황의 극복 등 거대한 구조적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너무도 무력하다.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기 어렵다.

한국 사회는 분명 위기다. 폭풍 속을 나는 새가 스스로 날개를 꺾는 경우는 없다. 진보가 지니는 ‘연대’의 가치와 보수의 ‘자기 책임성’을 양 날개 삼아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 20세기의 낡은 진보와 보수의 투쟁사는 21세기 민주주의 고도화를 위한 생산적 경쟁의 역사로 다시 써 내려가야 한다.



안희정 1965년 충남 논산 출생.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정무팀장과 민주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다. 2010년 충남지사에 당선 된 뒤 2014년 연임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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