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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나라면-'살인의뢰' 김상경·김성균·박성웅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M] 인터뷰

만약 당신이 연쇄살인마에게 가족을 잃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살인의뢰’(3월 12일 개봉, 손용호 감독)가 던지는 불편한 질문이다.
영화는 불쾌할 수도 있는 화두 앞에서 꽤 도발적인 결론을 내린다. 형사 태수(김상경)는 뺑소니 사고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유력한 용의자를 검거하고 충격에 빠진다. 그가 연쇄살인마인 데다, 자신의 여동생을 살해한 범인인 강천(박성웅)이었던 것. 태수는 법적 처벌과 사적 분노 앞에서 갈등에 빠진다. 한편 태수의 매부이자 피해자의 남편인 승현(김성균)은 강천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고 복수를 다짐한다. ‘살인의뢰’는 끔찍한 사건을 겪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그들이 사회악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다루는 영화다. 잔혹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 시대, 한 번쯤 곱씹어 볼 만한 소재다. 인터뷰로 만난 세 배우의 표정은 밝았다. 특히 시사회 도중 극도의 긴장 탓에 결국 응급실로 실려 간 박성웅의 상태는 상당히 호전된 듯 보였다. 너스레를 떨며 유쾌한 농담으로 현장 분위기를 밝게 만든 김상경과 김성균 그리고 박성웅과의 인터뷰를 전한다.

공과 사의 딜레마에 빠진 형사 김상경

다시 형사다. ‘살인의뢰’에서 김상경(44)은 ‘살인의 추억’(2003, 봉준호 감독) ‘몽타주’(2013, 정근섭 감독)에 이어 세 번째로 형사 역을 맡았다. 혹자는 ‘살인의뢰’를 두고 김상경의 ‘형사 3부작’의 완결판이라고도 칭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형사’라는 역할에 김상경의 연기를 한정 짓기에는 곤란하다. 전작들의 형사가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데 치중했다면, 이번에는 피해자 가족의 입장이 된 형사다. 공권력의 심판과 개인적인 처단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인물이다. 감정의 결이 훨씬 입체적일 수밖에 없는 역할이다. “제작사에서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전의 형사와는 다른 모습에 끌렸고, 도전해 보고 싶었다.” 보통 작품을 선택할 때 본인이 먼저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을 관객에게 전해 줄 수 있는지에 큰 비중을 두는 그는 ‘살인의뢰’가 던지는 비장하고 묵직한 질문에 크게 감명받았다. “태수가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3년 뒤 달라진 모습과 복합적인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관객에게 어떤 울림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상경이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다.

김상경은 역할에 혹독하게 몰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몽타주’를 촬영할 당시에는 극 중 인물에 몰두한 탓에 링거를 맞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대충 일하던 형사가 사건을 겪은 뒤 독종으로 변해가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몸무게를 열흘 만에 10kg을 감량했다. “관객이 태수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동안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보여준 찌질한 모습부터 TV 드라마에서의 자상하거나 지적인 모습과는 확실히 선을 그은 연기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아주머니’로 통했다. 스태프를 잘 챙겨주고, 늘 수다가 끊이지 않아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리고 매사에 소탈하다. 지난 2월 종영한 TV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KBS2)에서 보여준 능청맞고 따뜻한 문태주 상무의 모습 그대로다. “격식을 갖추는 건 중요하지만, 얽매일 필요는 없다. 신인 때는 격식을 강요하는 배우의 세계에 염증을 느껴 매일 소주를 마셨고, 심지어 그만 둘 생각마저 했다. 원래 내 성향이 털털하다. 하하.”

김상경이 여섯 살 난 아들에게 부쩍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너만의 멋진 하루를 살아라.’ 배우로 살아오며 터득한 소회가 함축된 말이다. “세상살이에는 정답이 없다. 몽테뉴의 『수상록』을 보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나답게 되는 법을 아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공감하는 말이다. 나만의 기준과 방식으로 사는 게 진정한 삶이 아닐까. 내 아들에게 늘 해주는 이 말은 지금 내가 배우로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배우는 대중에게 정답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불현듯 ‘살인의뢰’에서 태수의 마지막 선택이 관객과 어떻게 공명할지 궁금해졌다.

글=지용진 기자 windbreak6@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슬픔을 안은 제2의 가해자 김성균

‘살인의뢰’에서 승현(김성균)은 어느 날 아내가 무참히 살해된 뒤 고통 속에서 힘겹게 산다. 경찰이 아내의 시체를 끝내 발견하지 못하자, 승현은 직접 범인 강천(박성웅)을 찾아가 복수를 감행한다. 김성균(35)은 “승현이 살인범을 죽이고 싶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피해자에서 치밀한 복수를 준비하는 제2의 가해자로 극적인 변화를 겪는 승현에겐 일관된 슬픔이 묻어난다. 결말에서 승현은 강천에게 아내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며 애걸한다. “살인마를 마주하면, 주체하지 못할 큰 분노가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 촬영 날 현장에 도착하니 이곳 어딘가에 사랑하는 아내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감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저 아내를 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됐다.”

사실 승현은 김성균이 그간 맡아온 역할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세밀한 감정 변화를 보여주기보다 하나의 개성 있는 이미지로 관객의 혼을 빼놓는 역을 자주 맡았다. 단발머리를 휘날리던 조직폭력배(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 2012, 윤종빈 감독), 열흘 간격으로 이웃을 죽이는 연쇄살인마(이웃사람, 2012, 김휘 감독), 실종된 어머니를 찾아 다니는 무당(우리는 형제입니다, 2014, 장진 감독)이 그 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역할은 그에게 “배우로서 피해서는 안 될 역할”이었다. 승현의 감정에 어렵지 않게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김성균이 실제 두 아이를 둔 가장이란 점도 한몫했다. 게다가 8월에는 태명이 다복인 셋째 아이가 태어난다. “집으로 돌아가서까지 승현의 감정이 이어져 곤욕을 겪었다. 집에 돌아가면 행복한 가정이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안도감이 들면서 또 한편으론 내 가족이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김성균은 집에선 ‘괴물’ 연기를 도맡으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내 영화를 못 본다. 하지만 아이들이 크면 ‘이웃사람’의 살인마 역이라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곧 태어날 아기 외에 그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좋은 연기란 무엇인가”이다. “실력이 뛰어난 선배들의 연기는 하나로 정의하기 힘들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오래 하려면 좋은 연기를 펼쳐야 하는데, 지금은 그 답을 찾을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뷰 막바지, 김성균은 최근 본 프랑스 영화 ‘홀리 모터스’(2012, 레오 카락스 감독)를 언급했다. “이 영화는 한 사업가가 차 안에서 광대·걸인·광인 등으로 분장해서 다양한 인물로 살다가, 쓸쓸하게 집으로 가는 것으로 끝난다. 그게 배우의 삶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내 숙명이었으면 한다.”

글=윤지원 기자 yoon.jiwon@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이유도 죄책감도 없는 살인마 박성웅

“노 리즌(No Reason, 이유 없음).” 박성웅(42)은 그가 연기한 강천을 이렇게 정의한다. ‘살인의뢰’의 강천은 부녀자들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시신의 행방을 묻는 태수에게 “찾아봐”라고 얄밉게 대꾸하는 연쇄살인범이다.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강천의 표정은 그가 뱉는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머금고 있다. 입가는 웃고 있지만, 그 눈에는 경멸이 가득하다. “누가 벌레를 죽일 때 죄책감을 느끼겠나. 강천에게 피해자 여성들은 ‘버러지 같은 존재’나 마찬가지다.”

‘신세계’(2013, 박훈정 감독)의 이중구, ‘찌라시:위험한 소문’(2014, 김광식 감독)의 차성주, ‘황제를 위하여’(2014, 박상준 감독)의 정상하 등 박성웅은 그간 악역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 왔다. ‘살인의뢰’를 통해 박성웅은 이제껏 그가 해온 악역 연기에 새로운 정점을 찍게 됐다. 누군가를 살해하는 이유가 분명했던 과거 악역들과는 달리, 강천은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강천의 광기 어린 웃음은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다. 박성웅은 ‘케이프 피어’(1991,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마지막 장면에서 힌트를 얻었다. 범죄자 맥스(로버트 드 니로)가 보트와 함께 침몰하며 피해자 샘(닉 놀테)의 가족을 무표정하게 노려보는 장면이다. “‘너희는 평생 내 얼굴을 기억하게 될 거야’라는 의미였다.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에게 내 마지막 표정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박성웅은 ‘살인의뢰’에 합류하면서부터 그 표정을 연구하기 위해 3개월을 쏟았고, 현장에서 두 번 만에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살인의뢰’는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매우 험난한 작업이었다. 탄탄한 몸을 만들기 위해 42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신 채, 전라의 몸으로 18시간 동안 샤워장 격투 장면을 찍었다. 경찰 두 명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찍고 돌아온 날, 홀로 멍하니 밤을 샌 적도 있다. 그가 다시는 강천 같은 극단적 악역을 맡지 않겠다고 한 이유도 짐작이 간다 .

박성웅은 올해 데뷔 19년을 맞는 연기 인생에 대해 “참 무식했다”고 반추한다. 무명 연기자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던 TV 드라마 ‘태왕사신기’(2007, MBC)에 출연하기까지, 단역으로 활동하며 10년을 버텨 냈다는 이유에서다. 현재는 남서울예술종합대학 연기과 학과장으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무명 시절의 박성웅을 지탱해온 격언은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지금은 얼마나 동이 텄는지 그에게 물었다. “동이 텄지만 아직 해가 중천까진 안 뜬 것 같다. 10년을 그런 마음으로 살았기에,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도 모를 거다. 그저 열심히 해보겠다고 버둥대겠지.”

글=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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