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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북정책관 왜 바뀌었는가?

중앙일보

입력

노무현 대통령의 변화된 대북 및 대미 발언으로 인해 논란이 일고 있다. 방미기간 노 대통령은 "북한을 그렇게 많이 신뢰하지 않는다"(5.12 뉴욕타임스 기자회견)고 언급하고, "미 2사단의 현위치 주둔을 간곡하게 부탁할 생각이다"(5.12 뉴욕교민 간담회)고 밝혔다. "미국에 안가면 반미주의냐. 반미면 어떠냐"(2002.9.12 영남대 특강)"한미관계가 잘못된 것은 우리 외교가 일방적으로 미국을 추종하고 비판없는 외교를 펼쳤기 때문이다"(12.3. 대선 합동TV토론)는 종전 주장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저자세 친미외교'라는 비난과 '아름다운 변화'라는 찬미의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다.

또한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 내용에 대해서도 비판이 있다. '위협 증대시 추가적 조치 검토' 대목이 들어간 것은 대북 봉쇄 또는 군사적 조치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며, '핵문제와 남북 교류협력 연계 추진' 대목은 '병행 추진'전략으로부터의 후퇴라는 것이다. 그 결과 '민족공조' 우선적 입장에서 '한미동맹' 우선적 입장으로 참여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전환하였기 때문에,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및 대미관이 바뀐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북한은 이 같은 변화에 대응해서 남북대화를 단절시킬 것인가? 먼저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대미관 변화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살펴보면, 크게 상황.정책.개인적 요인 등 3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째, 한반도에서 점증하는 전쟁가능성이 노 대통령의 인식전환을 이끌어 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돈 오버도퍼(Oberdofer)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북한의 확고한 핵무기 소유욕, 미국의 불타협 자세, 한.미 동맹 이완과 한국인의 위기감 부재로 인해 한반도가 '절대 폭풍'(Perfect Storm)의 전쟁 소용돌이로 들어가고 있음을 경고(5.1)한 바 있다. 미국 당국자들과 언론 또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방안 추진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하다가, 이라크전이 속전속결 승리로 끝나자 북한지도부를 표적으로 하는 정밀타격방안(Surgical Strike)까지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북한은 베이징 3자회담(4.23∼25)에서 미국에게 핵무기 보유를 시인한 것으로 알려지고, 노 대통령의 방미기간 중 [한반도비핵화선언]의 폐기(5.12)를 주장하였다. 이에 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불안을 해소하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었음을 밝히고, 자신의 생각이 변화했음을 시인(5.18 전남대 특강)했다.

둘째, 참여정부의 대북 및 대미 정책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강력한 반발이 노 대통령의 정세인식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참여 정부는 정권출범 초기에 북핵 문제를 한국이 '주도적으로 해결'할 것이며, 한미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밝힌 바 있다. 한반도 문제를 우리 민족이 주도적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고, '월드컵 4강 신화'로 표출되었듯 경제발전과 민주화로 신장된 대한민국의 국력에 부합하게 한.미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데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누구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핵 위기는 미국의 세계 패권전략과 북한의 생존전략의 충돌과정에서 나타났다. 따라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방관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미국과 북한의 입장을 사려깊게 파악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균형감각을 갖고 대응해야 했다. 더욱이 본토 피격이라는 전대미문의 9.11테러사건으로 예민해진 가운데 이라크전을 추진해야 할 미국 지도부로서는 성조기를 불태우는 한국 일부 청년들의 '반미 운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평화적 행사인 '촛불 시위'에 대해서 까지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난 3월 초 국제적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의 한국에 대한 신용등급 하향조정 움직임과 미 국방부의 주한 미 2사단 재배치 문제는 이런 맥락에서 제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조치는 한국에 정치.경제.사회.군사 등 모든 측면에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이에 한국정부는 반기문 외교보좌관과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을 무디스에 급파(3.9)했고, 4월 말 김희상 국방보좌관은 주한미군 재배치문제를 북핵 해결이후 검토하자고 미국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다.

셋째, 노무현 대통령의 실용주의적 태도와 미국 체험이 변화를 쉽게 수용케 한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흔드는 사람들까지 가슴에 안고, 범처럼 주시하되 소처럼 나아갈(虎視牛行)'것이며, '개혁의 방법은 일부에서 걱정하는 것처럼 대립적이거나 과격하지 않다'고 청와대 홈페이지의 '대국민 공개서한'(4.18)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4.14)에서 '보수의 저항은 설득하고 극복하기 쉬우나, 개혁세력과의 마찰과 갈등은 감당키 어려움'을 토로함으로써 실용주의의 편린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같은 자세에서 노 대통령은 진보적인 386세대 참모들과 보수적인 전문엘리트 참모들 가운데서 상황에 따라 손을 들어주고, 정책을 선택하는 모습이다. 동시에 사안에 따라 정부 부처들이 의견 갈등을 빚을 때, '국익을 위한 선택 또는 불가피한 변신' 등 실용주의 논리 위에서 최종정책을 조율하는 자세도 보여주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핵문제 해결과 관련, '남북경협과의 분리'를 강조하는 통일부 입장보다 '한미정책 공조'를 상대적으로 많이 강조하는 외교통상부의 입장을 수용한 것이 그 실례라 하겠다. 그리고 이번 방미기간 미국의 세계 경제주도력과 국력을 체험하게 됨으로써 노 대통령의 북한과 한미동맹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북한은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대하여 불만스러워 하고 대남 대결구도로 나갈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서도 안된다. 북한은 비록 불만이 있겠으나, 남북대화에는 나올 것이다. 김정일 체제의 안정성에 위협을 주는 요인은 핵개발문제가 아니다. 핵개발문제는 한국과 미.일.중.러 등 주변국에 대한 위협 요인이다. 김정일 체제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경제난이다. 작년에 채택한 경제개혁조치(7.1)는 절대 물자부족에 따른 초인플레로, 신의주 특구조치(9.12)는 중국당국의 양빈 행정장관 체포로 인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일본과의 수교를 통해 받아내려던 체제발전자금(전쟁보상금)도 수교협상의 지연으로 확보가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한국이 대북 무력제재 포기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오히려 핵과 경협 연계 조치에 합의한데 대해 불만이 있겠지만, 일단 남북대화에 나와 경제지원을 확보하는 한편 참여정부와 미국의 진의를 파악코자 할 것이다.

북한은 남북관계 및 대미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와야 한다. 비록 노 대통령이 북한인권 실태를 우회적으로 지적(5.12 아시아 소사이어티 만찬)하였고, 부시 대통령 또한 과거 김정일 정권을 '악의 축', '무법국가'(Outlaw State)라고 비판한 적있으나, 이번 한미 정상회담과정에서는 김정일위원장 비판과 김정일체제 전복과 관련한 언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북핵만, 그리고 21세기 한미 군사동맹과 경제관계 및 정상간의 신뢰구축에 대해서만 합의한 것이다. 북한은 이 대목을 전략적 관점에서 잘 파악해야 한다. 북한 스스로 북핵 문제와 한반도 위기상황을 해결하고, 체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북한이 제5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5.19∼22, 평양)를 거절하지 않고, 개최한 것은 잘한 일이다. 예정되어 있는 6.15 민족통일대축전, 7차 이산가족상봉(6.19∼24, 금강산), 제11차 남북장관급회담(7.9∼12. 서울),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8.21∼31, 대구)와 2차 3자회담에도 북한은 적극 참가해서 생존과 발전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함께 모색해 가야 한다. 또한 참여정부는 한미관계를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만큼, 이제 이를 정상적으로 가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수순은 선 국민화합, 중 한미 및 국제협력, 후 남북관계개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용주의가 지나칠 때는 국내외적으로 신뢰를 다시 상실할 수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북핵위기를 풀고 한반도 평화를 이뤄가기 위해서는 명실상부한 참여정부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국민화합을 위해 다시 한번 더 '호시우행'에 더욱 힘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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