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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남방전선의 고려독립청년당|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태평양전쟁에 동원되어 남방으로 갔던 조선인 군속들이 종전후 전쟁범죄자로 재판에 회부된 사실은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다. 그렇지만 독도에서 독립의 희망을 안고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 항일전을 계획했던 일은 오래도록 묻혀져 있었다.
고려독립청년당이 최초로 행동한것은 처절하지만 다소 무모했다, 사건은 45년1윌4일 안바라와 포로수용소 (인도네시아령)에서 일어났다.
이 수용소의 조선인 군속이던 손양섭 민영학 노병한등 세명은 고려독립청년당의 요원으로 대일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들에게 싱가포르 전속명령이 내렸다. 그날 싱가포르로 가기위해 트럭으로 자카르타로 향해 떠나던중 이들 셋은 충동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수용소로부터 8km쯤 왔을때 무력으로 트럭을 탈취, 안바라와로 되돌아왔다. 이들은 무기창고로가 경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장한뒤 수용소장의 승용차를 뺏어타고 수용소장 형무소장 군납업자등 안바라와의 일본인들을 닥치는대로 습격했다. 그러던중 대응사격에 마주쳐 민이 부상했다.

<무기탈취, 일인습격>
애초부터 계획이 없었던 행동이었기에 부상한 민을 옆에놓고 어쩔줄 몰라했다. 민은 자신은 상관말고 산속으로 탈출하라는 부탁을 남기고 그가 지녔던 총으로 자결했다. 남은 두명은 수용소로 돌아와 동료군속들로부터 식사를 제공받은뒤 수용소안의 구석진 창고에 은신했다.
본부로부터 헌병대가 출동, 수색이 본격화 되었다.
이튿날 둘은 죽은 민의 복수에나서 수용소의 사무실을 한차례 습격한뒤 역시 창고에 숨어있었다. 일본군 수색대는 안바라와의 모든곳을 수색했지만 그들이 수용소안에 잠복해 있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날 저녁 역시 당원이던 조규학이 두사람을 찾아왔다. 불잡혀 조직이 노출될 위험도 있어 하수구를 통해 빠져나가 정글속으로 숨어들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음날 이들 둘은 조선인 군속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은신처였던 창고에서 자결했다. 고려독립청년당원의 안바라와 반란은 일본인 10여명의 희생으로 사흘만에 막이 내렸다.
○…조선인 군속들이 부산항을 떠난것은 42년 8월말이다. 그해 6월까지 전국각지에서 모집되어 부산의 노구찌부대에서 2개월의 군사훈련을 마친 이들 3천명의 군속들은 포로수용소에 배치될 용인들이었다. 이들 군속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만리이역에서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 지도한 인물은 이활이다. 이활은 중학교를 나온뒤 서대문 형무소 간수로 취직했다. 이활은 그곳에서 민족의식에 눈을 떠 수감된 애국지사의 외부연락을 맡는 항일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러다 위험이 닥쳐 중국으로 도주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중국 동부지방에서 활동했다.
그가 언제 상해로와 임시정부와 연결되었는지는 확실치않다. 아뭏든 그가 임정의 김구와 연결되있을때는 중국어에도 능통한 유용한 전사였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그에게는 적정을 탐지하라는 밀령이 주어져 일본헌병대의 중국어 통역으로 침투했다. 그러다 역시 의심을 받게되어 위험이 닥치자 도리없이 이번엔 서울로 되돌아와 은신했다.
○…이활이 새로운 탈출구를 찾은것이 군속이 되어 남방전선으로 가는 일이었다. 그는 군속을 지원했고 남으로 가는 수송선안에서 활동을 재개, 동료 군속중에서 동지를 포섭했다. 기회가 오면 탈출해 일본군과 맞설수 있으리라는 한가닥 희망에서였다. 그랬지만 모두들 분산된데다 틈이없는 최악의 포로감시생활에 묶여 어떤일도 할수없었다.

<연합군과 합류계획>
그들에게 기회가 온 것은 44년 연말이다. 전황은 일본군에게 절망적으로 되어갔고 카이로선언도 발표되었다. 포로들도, 조선인 군속들도 단파방송, 현지의 한일조직, 더러는 연합군 비행기가 뿌리는 비라를 통해 사태변화를 알고 있었다.
일본군의 불안은 커져갔다. 연합군이 상륙할때 현지 항일 게릴라의 후방교란이나 포로반란은 우려의 대상이었다. 일본군은 이런 불안에 대비해 조선인 군속재훈련를 시켰다.
우선 불온하다고 지목된 2백명의 조선인 군속이 1차교육대상이었다. 교육은 11월하순부터 한달간 실시되었다. 이것은 이활그룹에겐 좋은기회였다. 교육이 끝나 모두가 원대복귀하기 직전인 12월29일 이활은 뜻을 같이해온 동지들과 회합했다. 멀지않아 연합군이 이곳에 상륙한다. 이때 조선인 군속들은 포로들과 함께 탈출해 배후교란작전이나 연합군과 합류한다. 그준비를 서둘러야한다. 이리하여 고려독립청년당이 정식 출범했다. 이활을 총령으로한 당의 부서와 각분소의 조직·연락책도 선정되었다.
○…고려독립청년당은 발족이전에 이활그룹에 의해 많은 준비가 이루어져 있었다. 이활은 중국인 항일지하조직과 접선, 그들의 연락망을 이용하는것과 재정지원을 약속받고 있었다. 고려독립청년당은 무기와 포로연락이 소임이었다. 출발은 순탄했고 전망도 밝았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에 마주쳤다. 45년 1월4일 자바 각지역 군속의 싱가포르 전속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본소근무이면서 청년당의 군사부장 김현행, 조직부장 임헌근, 자카르타지부장 문학선등도 전속에 포함되었다. 분소의 중요조직원도 전속에 포함되어 당조직은 치명타였다. 이활은본소의 간부들과 대책을 협의했다.

<성항으로 전속명령>
그곳에서 수송선탈취계획이 짜졌다. 전속되는 군속중 9명이 핵심당원이니 수송선탈취는 어렵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그럴즈음 안바라와의 반란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반란으로 당원3명은 희생될 운명이었다. 1월6일 반둥지역의 박창원 오은석 두당원이 전속명령에 따라 자카르타로 왔다. 전속되는 6명은 본소의 핵심당원과 이날밤 다시 모였다. 안바라와의 반란때문에 조직에 위기가 닥친이상 수송선탈취를 강행키로 했다. 계획을 검토했다. 문제는 수송선을 장악한후 정확한 항로를 잡는 일이었다. 탐지한 결과 수송되는 포로는 네덜란드와 영국군장교들이었다. 임헌근이 수송대상인 네덜란드 장교와 접촉했다.
『우리들 조선인 군속은 수송선을 해상에서 탈취, 인도양으로 돌려 연합군쪽에 탈출할 계획이다. 일본군은 일개분대만이 인솔자로 승선하기 때문에 우리들만으로 충분히 제압할수있다. 당신들이 도울일은 일본인 선원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을때 수송선을 조종하는 일이다.
네덜란드장교는 포로들과의 협의후 동조할것을 약속했다. 탈취직전의 지휘는 군사부장 김현재가 맡았다. 당초 9명이던 당원이 안바라와 반란으로 6명으로 줄어 다소 불안했다. 그래서 전속에 포함되지 아니한 본소의 1인이 무단승선키로했다.
수송선은 1월8일 출항케되었다. 포로1천2백명, 조선인 군속30명, 거기에 인술장교와 1개분대 병력이었다. 그런데 정작 출항날 부두에 나갔을때는 예기치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송지휘관외에 장교 수명이 나와있고 30여 하사관들이 부두에나와 포로의 소지품 검사를 하고있었다. 통상 포로의 소지품 검사는 조선인 군속들의 책임이었는데 의외였다. 사태가 심상치않다고 직감한 김현재는 거사중지를 제안했다. 임헌근이 좀더 두고보자고 했다. 그러는데 시간이되어 군속들도 승선했다.
그런데 선상에 오르자 조선인군속도 한 선실에 수용되었고 일본군이 넌지시 감시했다. 그위에 비행기가 줄곧 수송선을 엄호비행했다. 수송선 탈취계획이 어렴풋이나마 누설된것을 직감할 수있었다. 불확실하지만 어떤 낌새를 챘다면 이러나 저러나였다.
이리하여 임헌근이 네덜란드장교와 접촉, 결행을 통고했다. 그런데 이번엔 포로측에서 고개를 저었다. 정찰기가 감시하고있어 탈취엔 성공한다해도 일본군영역을 벗어나기 전에 공격을 방아 수송선은 격침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리하여 거사는 결행되지 못했다.
○…1월28일 이활의 검거에서 시작되어 3월까지 고려독립청년당의 핵심요원둘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형무소서 종전맞아>
3월 싱가포르의 김현재등의 체포로 관계자 9명이 모두 검거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관례대로라면 그들 모두는 총살형이었다. 그랬는데 10년에서 7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패전이 내다보이던 때여서 내려진 관대한 조치였다. 그들은 군형무소에서 종전을 맞이했고 8월20일께 모두풀려났다.
조선인은 귀환을 준비했다. 군속들, 민간인 징용자들, 여자정신대란 이름의 위안부들이 조선인회를 조직, 귀향준비를 했다. 고려청년당의 요원들이 이 조직을 이끌고 있었음은 말할것도없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들중의 몇사람은 포로학대라는 오명을 쓰고 전쟁범죄자로 갇히는 몸이되어 법정에 섰다. 나라없던 젊은이들이 겪었던 가장 참담한 경험이고 기록이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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