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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가득한시] '서울로 가는 평강공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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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라연(1951∼ ) '서울로 가는 평강공주'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 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얼마전 한 시상식장에서 수상소설가가 폭탄선언을 했다고 한다. 내 소설은 실은 공저였다고. 그 공저자는 가난한 소설가를 늘 지지해준 아내였다고. 요즘의 공주와 왕자들 신혼집에도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지. 없는 것이 많아 더 따뜻한 신혼일기를 쓰는지. 전구 나가면 어둠속 두 눈빛 더욱 뜨거워지는지.

김경미<시인>

◇필자약력 ▷1959년 서울 출생 ▷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쉬잇, 나의 세컨드는』▷노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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