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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체르넨코」시대는 출범 하루만에 병색을 보여주고 있다.
「안드로포프」장례식에서의 더듬는 말솜씨, 힘겨운 거수경례가 불길한 해프닝이었던 것 같다.
조문사절로 모스크바를 다녀온 영국의 「D·오언」(전 외상)은 의사출신답게 「체르넨코」를 폐기종(폐기종)으로 진찰하고 있다.
아무튼 「체르넨코」는 새로 권좌에 앉은 인물치고는 얼굴에 화색이 없다.
이 순간 크렘린의 로열 박스를 주시하고 있는 세계의 시선은 성급하게도 한 「젊은이」에게 쏠려 있다. 건강색이 넘치는 미남형의 신사. 외신에 따르면 어느 소련 관리는 서방인사들에게 바로 그가 소련의 「제2인자」라는 귀띔까지 해주었다.
「미하일·고르바초프」. 52세. 소련 정치국 정위원 들의 평균 연령(67)으로는 분명히 15년 연하의「젊은이」다.
그는 가문이나 학벌도 공산국 지도자답지 않게 화려하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농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 고향 스타브로폴 농업연구소에서 경종학(agronomy)전공.
그의 학구열과 야심은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받은 법학박사 학위에도 담겨져 있다.
그가 일약 크렘린의 스타덤에 데뷔한 것은 지난 70년대 말 4년이나 거듭된 흉년 덕분이다. 「고르바초프」는 농업의 부분적인 사유화 정책을 도입해 증산의욕을 북돋우는데 착안했다.
그 무렵 소련 농민들은 국가 전 경작지의 불과 2%를 사유화하면서도 야채나 계란, 우유, 고기(육류)는 총생산의 3분의 1을 공급하고 있었다. 바로 그 강점을 농업정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소련경제에선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사상적인 폭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었다.
그가 소련의 대중들 앞에 공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4월 22일 「레닌」탄생일 이었다. 기념식에서 당대표로 연설을 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 5월엔 처음으로 자본주의의 바람을 호흡할 기회가 있었다. 캐나다를 방문한 것이다. 농촌을 돌아보면서 그는 많은 것을 끊임없이 묻고, 대답을 구했다. 조용하고 간명한 어투는 그의 지적인 면모이기도 했다.
그의 「2인자설」은 러시아의 어떤 변화를 암시하는 것도 같다. 혁명적 변화는 아니지만, 적어도 미련한 곰의 인상은 벗어난 인물이라는 정도의 변화. 그것도 사실은 소홀히 보아 넘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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