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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길 굽이마다 서울 600년 흔적 … 살아있는 박물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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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인왕산 중턱에서 바라본 한양도성 인왕산길의 전경. 도성 너머로 사대문 안 서울 도심과 남산타워가 보인다. 인왕산길은 보존 상태가 상대적으로 좋아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강기헌 기자]

도시는 차도와 인도가 오랜 세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키며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길이 만들어지고 합쳐지는 과정을 살펴보는 건 도시를 이해하는 첫 단계입니다.

 본지는 ‘서울, 가볼 만한 길’ 시리즈를 통해 서울의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한양도성길을 둘러봤습니다. 도성길은 600년 수도의 시작점이자 현대 도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공간입니다. 그곳엔 우리의 부흥과 좌절과 극복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인왕산길을 시작으로 남산·낙산·흥인지문·숭례문 구간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내려 서울교육청 방향으로 10분 남짓 걸으면 길게 뻗은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619년 전인 1396년, 태조 이성계가 쌓은 한양도성의 모습이다. 500년 조선왕조의 도성이었고, 왕조 시대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한 국가의 수도인 이곳은 서울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가볼 만한 길’ 탐방을 도성에서 시작한 이유다.

 서울교육청에서 10분을 더 걸어 종로문화체육센터 앞에 이르면 본격적인 성곽길이 시작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잘 정돈된 정원 같은 도성 안쪽 길을 거닐 것인가, 거친 등산길 같은 도성 바깥 길을 걸을 것인가. 지난 6일 이곳에서 만난 장선근(77)씨는 지팡이를 짚어야 할정도로 다리가 편치 않았지만, 도성 외곽 길을 택했다. 3월의 봄볕 속에 서 있던 그는 “도성은 밤에 제일 예쁘고 걸으려면 바깥으로 걸어야 한다”고 했다. 성곽의 건축미를 하나하나 눈으로 즐기기 위해선 바깥 길을 택해야 한다는 얘기다.

 평일이었지만 ‘순성(巡城)놀이’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주부 박연정(54)씨는 “봄을 맞아 성을 한바퀴 돌고 있다”며 “서로 다른 모습의 성곽길을 걷다 보면 마치 수백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인 유본예의 책 『한경지략(漢京識略)』엔 ‘봄여름이면 한양 사람들은 짝을 지어 성 둘레를 한 바퀴 돌며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인왕산 구간이 ‘순성’의 시작점이 된 건 보존이 잘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인왕산길은 굴곡진 현대사와도 관련이 깊다. 1968년 김신조 등 북파공작원들이 청와대를 공격하려 했던 1·21 사태가 벌어지면서 인왕산 도성길은 25년간 폐쇄됐다. 사람이 찾지 않으니 훼손될 일이 없었다. 이 사건 이후 청와대 주변의 경계가 더욱 삼엄해졌고 개발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 결과 산업화 시대의 개발광풍에서 비껴날 수 있었다.

 유네스코(UNESCO)가 한양도성을 ‘세계유산’ 등재 추진 대상에 선정한 까닭도 600년을 버텨온 도성의 연속성에 있다. 서울시 승효상 총괄건축가는 “1000만 인구의 대도시 중 거대한 도성을 끼고 있는 곳은 세계에서 서울이 유일하다”며 “세계적인 도시들은 대부분 평지에 만들어지는데 서울은 특이하게 인왕산 등을 끼고 만들어져 이런 모습으로 발전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600년 전의 도성이 여전히 21세기에도 삶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도성의 가치를 끌어올린다. 승 총괄건축가는 “접근성이 뛰어나 언제나 기분좋게 걸을 수 있는 공원으로서의 역할도 한다”고 했다.

 정상을 지나면 땀을 식힐 수 있는 장소가 기다린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서시(序詩)’를 구상한 곳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재학 시절 인왕산 밑 동네인 누상동에서 하숙을 했다. 언덕엔 서시가 적힌 시비와 윤동주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더 걷다보면 창의문(彰義門)을 만날 수 있다.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사소문 중 유일하게 문루(門樓·문 위에 세운 높은 집)가 남아있다. 종로구청 정미덕 관광사업팀장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진 것을 영조 16년(1740년)에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나무판에 새겨 걸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글, 사진=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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