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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신간회(상)|발굴자료와 새 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 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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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1 운동은 한국민족이 앞으로 지녀오던 일대 동력의 화려한 자기전개였다. 비록 물리적인 힘에 의해 좌절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내외의 객관적 정세에 끼친 영향은 몹시도 큰 것이었다.
일제는 이로 말미암아 합병 후 10년 동안 줄곧 고수해오면 정책표현의 변화를 강요당했다. 강권에 의한 탄압을 주조로 했던 통치책이 이른바 문화정치란 당의를 두르고 나타났다.
이 문화정치가 실은 무단정치의 본질을 강화한 일종의 위장전술이며 오히려 민족의 분단과 회유에 주안을 둔 보다 적극적인 식민통치책이였음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일제는 제한된 범위로서나마 폭력의 자기억지라는 제스처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때까지 민족의 영도세력임을 자임하던 민족주의진영이 운동의 방향과 방법론을 놓고 좌우로 분열한 것도 3·1운동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의 하나였다.
이른바 민족주의 우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통치측의 온정주의라는 환상이 깨어지자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먼 장래의 일」로 돌려놓고, 우선은 민족의 개량과 실력양성이 더 시급하다는 주장을 폈다. 이 주장은 마침내 독립의 부정을 전제로 하는 자치론을 출현시키기에 이르렀다. 천도교의 최린, 동아일보계의 송진우 등은 대표적인 자치론자였다.

<이광수, 장문의 논설>
이들 자치파에게 즉각적인 반발을 보인 세력이 민족주의좌파 그룹이었다. 일제에 대한 비타협과 절대독립의 노선에 충실했던 이들은 특히 앞의 최·송 등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자치론자들이 자치단체조직을 구체화시킬 기미를 보이자 곧 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그 기도에 정면으로 대결했다. 식민지·반식민지의 민족해방에 대한 레닌적 투쟁이론을 무기로 갖춘 사회주의자들은 당시 이미 조선공산당을 거점으로 하여 상당한 잠재력을 갖는 세력으로 부상해 있었다.
신간회가 탄생하게 된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물론 민중의 의식이 급격히 성장한 것도 신간회 탄생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민중은 3·l운동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종 단체간의 상투적인 파쟁과 분열에 극심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전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는 단일운동체의 출현을 열망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신간회는 일제 문화정치의 기만성 위에 축조됐다는 일종의 허구성을 가지면서도 자치론에 대한 민족적 반발, 식민지 민족해방이론으로 수용된 사회주의의 팽배, 성장된 민중의식 등 운동전개에 이용이 가능했던 요소들을 모두 포괄하는 최대치의 잠재운동역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민족주의진영의 우파계열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치단체조직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1923년 가을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관헌자료에 따르면 조선일보간부 신석우, 동아일보간부 송진우·김성수, 천도교간부 최린 등은 함께 김성수의 집에서 여러 차례 회합을 갖고 유력한 민족단체의 조직에 대해 협의했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알려진 이른바 「연정회」조직 계획이다. 그들이 24년 1월 2일부터 5회에 걸쳐 동아일보 지상에 실린 「민족적 경륜」이란 장문의 논설은 여론탐색과 그 조작을 위한 애드벌룬이었다.
이광수가 집필한 이 논설의 요지는 『정치·산업·교육의 3대 결사를 일으켜 이들 결사로 하여금 서로 협력 전개케 하여 조선민족경륜 대도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설문 안에 담긴 『조선 내에서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라는 단서적 표현이 문제가 되어 이 논설은 강경파에 속하는 일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호된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홍명희가 중추역할>
동아일보 불매동맹이 조직되고 각지에 성토문이 발송되는 사태에 놀란 동아일 측은 논설에 대한 해명과 함께 이광수의 퇴사를 제물로 삼음으로써 간신히 동요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최린·김성수·송진우 등은 26년 후반 다시 극비리에 자치운동단체조직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문필가인 최남선과 천도교 구파인사인 이진린도 가세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해 10월초부터 박희도·김준연·조병옥·최원순·한위건·백관주 등을 모의에 끌어들여 은밀히 계획을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안재홍과 김준연은 본래 자치운동계획에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논의의 내용을 「조선민흥회」측에 몰래 알려 그 저지를 꾀하게 했다. 민흥회 측의 방해공작으로 10월 14일에 열 예정이던 준비위원회는 유회되었고 결국 민족주의좌파그룹과 사회주의자들의 거센 반발 앞에서 자치운동단체 조직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간회의 발기가 가능했던 것은 이처럼 자지단체조직 움직임에 반발한 민족주의좌파인사들과 사의주의자들이 굳게 결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간회가 발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은 홍명희였다.
일제의 한 관헌자료는 『26년 말 당시 정주 오산 학교교사로 재직하던 홍명희가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상경했다가 최남선에게서 자치운동단체계획을 전해 듣고 곧 안재홍·신석우 등과 대책을 협의한 결과 진정한 민족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이어 권동진 박내홍 박동완 한용운 최익환 등의 찬동을 얻고 다시 북경의 신채호에게도 연락, 그의 찬동을 업어 발기인에 가세시켰다』고 적고있다.
26년 12월중순경부터 논의가 일기 시작한 신간회조직준비활동은 27년에 접어들면서 급속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1월초 조선일보사에서 회동한 권동진·홍명희·이감성·박동완·백관수·안재홍·신석우·한기악 등은 신간회를 발기 할 것에 정식으로 합의한 뒤 임의 선정된 발기인들을 접촉하여 취임승낙을 얻어내고 강령을 초안하는 등 창립준비를 서둘렀다.
합법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였던 만큼 총독부당국의 허가가 선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명칭이나 강령의 내용은 허가를 위한 절충을 거치는 과정에서 많은 수정이 가해졌다. 그들이 당초 생각하고 있던 「신한회」란 명칭은 당국의 거부에 부딪쳐 「신간회」로 고쳤다. 「고목출신간」이란 문구에서 홍명희가 따와 지었다는 이 신간회란 명칭은 공교롭게도 일본어로 표기할 경우엔 「신한회」와 음가가 같다.

<총독부서 강령수정>
강령도 여러 차례 손질을 거쳐야했다.
처음의 안은 「1.조선민족으로서 정치·경제의 구경적 해결을 꾀함. 2,민족적 단결을 공고히 함. 3,타협주의를 부인함』이란 내용으로 돼있었으나 당국과 절충 끝에 『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으로 바뀌었다.
당국은 「민족」 「구경적 해결」 「타협」 등 조금이라도 투쟁의 강도가 엿보일만한 단어는 일체 용납하지 않는다는 방침으로 임했다. 그 때문에 일반이 그 합의를 심정적으로 헤아리기엔 어려움이 없었다고 해도 역시 강령의 애매성과 미온성에 대한 비판은 이 단체가 해체될 때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신간회의 조직준비내용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27년 1월 14일자 「대판조일신한부연조선조일」지상을 통해서였다.
『명칭도 신간회로 명기되고 또 발기인 27명의 선정사실이 게재된 것을 보면 신간회발기준비는 그 시점에서 이미 종료돼 있었던 것 같다』고 일본학자 「미즈노」(수야직수)는 그의 한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27년 1월 19일 신간회는 종식으로 발기를 선언했다. 앞서 든 3개항의 강령과 27인의 발기인명단이 이튿날 동아·조선 등 국내신문을 통해 발표되었다.
발기인의 면면은 그야말로 「민족단일당」의 이미지에 어울리게 매우 다양한 것이었다.
3·1 민족대표·교육자·언론계인사·종교관계자·지주·자본가 등 그대까지 민족운동에 몸담은 인사들의 총집결체라 이르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호화진용이었다.
발기이후 신간회가 걸머져야 했던 가장 큰 과제는 「조선민흥회」와 합동으로 실현시키는 문제였다.
조선민흥회는 26년 7월 「조선민족의 공동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단일전선결성」을 목적으로 서울청년회계 사회주의자와 명제세등 조선물산장려회의 민족주의자가 중심이 되어 발기에 착수한 단체였다. 비록 일제의 제지와 간섭으로 창립에 이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계획자체가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단일전선을 구축하려 했던 점에서 신간회와 민흥회의 지향점은 결국 같은 것이었으며 따라서 두 단체의 합동이 제기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귀추였다고 할 수 있겠다.
몇 차례의 회합을 거쳐 민흥회의 발기인대회예정일이였던 2월 11일, 민흥회 측은 신간회와의 통합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통합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어떤 조건이 제시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민흥회발기인제씨가 모든 것읕 백지로 하고 허심탄회하게 통합에 응한 사실』 운운한 당시 신문의 보도를 보면 민흥회 측의 대폭적인 양보가 통합을 이루는 밑거름이 됐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던 것 같다.

<27년2월 창립대회>
이튿날인 2월12일, 양측은 합동으로 창립준비위원회와 발기인총회를 열고 명칭을 신간회로 확정시킨 다음 권동진 외 11인의 창립준비위원을 선정했다.
그리하여 2월 15일 하오7시 서울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는 민족단일당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식민지하 최초의 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장은 대단한 성황이었다. 출석회원만 해도 2백50여명, 2층에 마련된 방청석은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가 문제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신간회의 출현이 사회의 이목을 경동(경동)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당시 창립대회를 취재했던 한 기자는 적고 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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