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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MT의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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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K군의 잠을 설치게 했던 5월의 첫 MT. 1박2일의 의식화 교육을 떠나던 날은 유난히 하늘이 파랗게 높았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하루종일 닭 쌈을 하고 밤이면 꼬박 새우면서 토론을 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운동은 주로 닭 쌈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캠퍼스 안에서 쉬는 시간에 닭 쌈을 하면 의식화된 학생으로 간주된다는 게 K군의 설명이다. "술은 소주만 마셨고 안주는 고추장과 새우깡이 전부였습니다. 식사는 된장찌개에 김치뿐이었고 담배는 청자 이상을 못 피우게 되어있었습니다."
이른바 「고통받는 민중」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한 생활의식의 첫 전환이라는 것이다.
"하루종일 닭 쌈을 하고 소주를 마셔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공복감이 왔습니다. 그때 철야 토론이 시작되더군요."
K군은 오히려 이런 자학적 분위기가 토론의 열기를 더하고 멤버들의 소속감을 굳히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신입생들에게 주어졌던 의식화 교재에 대한 3학년 리더선배의 간결한 코멘트가 있고 나서 테마발표가 있었다.
P선배의 주제는 「대학인의 사명」. "여러분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사회가 안고있는 많은 모순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순은 단편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인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자,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민중에게서 모순의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근대사는 이들 억압받는 자들의 저항의 역사였고 그 선봉은 우리 학생들이었습니다."
K군은 고등학교 때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어휘의 구사에 당황했다. P선배의 열변은 계속됐다.
"우리 S대학생들의 취약점은 그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이 갖고있는 입신 출세주의입니다. 정부관리가 된다거나 자본가가 되겠다든가 소시민적 엘리트 군이 되겠다는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상업적 대학인이 된다면 민중을 위한다는 것은 끝내 허구일 뿐입니다."
"선구자" "정의가" 합창을 하고 나면 또 다른 선배의 테마가 열을 토했다.
1박2일의 첫 MT를 마쳤을 때 K군의 눈은 충혈이 되었고 선배들이 나열했던 생소한 어휘들이 귓전에 윙윙댈 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대학이 젊음의 지적 갈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길잡이 스승마저 없는 오늘의 대학풍토에서 MT는 대학인의 또 하나 대학 같은 기능을 하고있는 것이다.
몇 주일이 지나도 MT에서 들었던 「새로운 충격」을 설명해주거나 지도하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다. 선배들이 지정해준 "서양 경제사론" 을 한달 만에 독파했는데도 강의실에선 겨우 3분의 1도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다.
K군이 "한국경제론" "농업경제학 서설" 등을 떼었을 때쯤인 7월초 P선배는 그에게 하계 봉사활동 참가를 제의했다.
"고통받는 민중의 실상을 이해하고 동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고된 육체적 노동과 강한 정신 트레이닝으로 학생이라는 특권 의식을 씻어버릴 수 있지."
새벽 5시에 일어나면 하오 7시까지 노력 봉사, 밤9시까지 농민과의 대화, 새벽 2시까지는 반성 및 토론으로 수면 시간은 3시간 정도였다. 대학의 정규적인 서클 활동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열정의 체험으로 느껴졌다.
고된 노동으로 신경은 예민해졌고 상호 맹렬한 이론 공박이 오갔으며 합창은 휴식을 대신했다. K군은 그때의 분위기를 "유사 종교적" 이었다고 말한다.
매일 밤 좌우명 10훈과 생활신조 11훈을 큰소리로 제창한다.
"형제와 같이 살고 형제와 같이 죽는다" "비밀은 죽음으로써 엄수한다" "시간과 약속은 철저히 지킨다" "이론 습득에 노력하고 심신을 단련한다" 는 게 좌우명의 주요 훈목.
생활신조의 주요 골자는 "동료와 선배가 오류를 범하는 것을 보고 방치하거나 우정·평화를 빙자해서 원칙적인 논쟁을 회피하는 것" "집단적 생활보다 개인생활을 우선하는 것" "박학다식을 추구하고 개인 안전을 도모하며 자기에게 돌려지는 비판만 피하려고 하는 것" "집단적 결정보다 자신의 결정을 우선하는 것" "대중 속에서 선전 선동을 적극적으로 못하는 것" 등이다.
K군이 회의를 느낀 것은 여기서였다. 생활 훈이나 좌우명이 개성과 다양한 창의력, 인간의 감성을 무시한 「획일적」이고 「집단적」이라는데 회의를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해결해야할 모순으로 지적하고 있는 현실 구조의 도그마와 방향이 다를 뿐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대학이 수용하지 못한 문제 의식을 MT를 통해 터득했고 강의실에서 받은 지적 영양실조를 MT의 커리큘럼에서 보충한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가진 자 보다는 갖지 못한 자에게, 소수보다는 다수에게 더 큰 애정을 보이겠다는 자세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상·철학·역사·경제·현실문제는 그 어느 것이고 현실 구속적인 면과 이상 추구적인 양면을 갖고있다.
이 두개의 양면성을 탐구하고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신의 자유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학의 경우 「학문」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그래서 대학은 「상아탑」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우리의 대학은 그런 상아탑의 자유를 제약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그대로 이미 빛 바랜 이데올로기에 마저 무면역생을 드러내 문제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교 정책의 단견이 빚은 소산이다.
K군의 갈등은 계속됐다. 그러나 그의 지성은 흑백논리나 부정일변도의 MT 과정에 회의를 더해갔다. 소극적 행동은 마침내 그룹에서 「나약한 지식인」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됐다.
S대 당국자는 K군 정도의 의식화 과정을 밟은 학생이 신입생의 상당수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대학 초년병들이 한번쯤 겪는 「탈각의 체험」 임에 틀림없다.
K대 K교수-. "새로운 경험이며 홍역입니다. 그들의 고뇌를 치유하고 그들의 의식을 이끌어줄 교수가 없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교수들의 압도적 다수가 미국식 사회과학, 즉 형태론적·기능주의 적 과학의 속성인 지식의 단편성·비전체성·국소성에 길들어져 학생들 속에 잉태되기 시작한 문제에 대한 시각은 물론 그들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자세마저도 없다는 것이 K교수의 진단이다.
오늘의 대학 강단이 대학 문화를 주도해야될 자리를 캠퍼스 밖에서 자율적으로 「이념무장」 한 의식 학생들에 의해 점령당했다면 지나친 속단일까.
10, 11월은 가벼운 DM (데모) 이 있었다.
K군이 P선배의 MT 그룹과 결별한 것은 그와 겨울 방학을 앞두고 가진 1학년 마지막 MT 토론 후였다. "P선배님. 선배님은 4·19의 영광을 의식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오늘의 학생운동은 그 토양이 그때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K군은 K군의 논리를 전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언론이 대학의 외침에 침묵하고 야당이 야당구실을 못하고있는 현실 아닌가."
"그렇다고 대학인의 에너지를 온통 데모·구속·제적·강제 집행의 악순환에 소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나약한 지식인·소시민적 사고야."
"P선배의 현실문제 타개책은 걸국 무엇입니까."
"폭력이야!"
겨울 방학이 되었다. 30명이던 MT 그룹 회원도 10명으로 줄어들었다. 20명은 K군처럼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채 고향으로 떠났다.
나머지 10명은 그 해 겨울 「P·바람」의 "정치적 경제성장론" 과 「E·H·카」의 "볼세비키 혁명" 을 열심히 탐독했다.
K군은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S대에 합격했다고 온 마을 골목을 덩실덩실 춤을 추던 어머니. 지금쯤 도착할 아들을 위해 군불을 지폈을 어머니가 그리웠다.
방학이 끝날 무렵인 어느 날 K군은 구속자 가운데 P선배의 이름이 들어있는 신문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P선배가 그에게 외쳤던 "폭력!"이 발톱처럼 살아났다.

<특별 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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