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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완의광고로보는세상] '전통'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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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훌륭한 정치지도자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은 아마 동탁일 것이다. 그는 백성을 오로지 공포로만 다스렸고, 주색잡기에 골몰한 인물로 묘사된다. 오죽했으면 그가 죽은 뒤 누군가 그의 배꼽에 심지를 박아 불까지 붙였을까. 이런 동탁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무리들이 이각과 곽사 같은 무리다. 그런데 원래 변방의 미천한 장수 출신으로 동탁의 사병에 불과했던 이들은 대권을 잡자 가장 먼저 동탁의 신격화에 착수한다. 시체를 수습할 길이 없자 향나무로 동탁의 형상까지 만들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준다.

옛것을 긍정하고 때론 이를 신격화한 뒤 거기에 편승하는 방법. 이는 정치에서도, 학문에서도, 그리고 마케팅에서도 흔한 수법이다. 과거가 늘 옳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전통을 형성했다는 이유만으로 때론 그 전통이 논리나 이성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자 왈…"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이라고 시작되는 말에 시비를 걸기는 어렵다. 서로 '원조집'이라고 주장하는 족발집들도 전통에 약한 소비자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셈이다. 골동품 수집에 집착하는 '벼락부자'의 심리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

피아노에 관한 한 '스타인웨이'는 최고의 상표다. 리스트.바그너.루빈슈타인.베를리오즈 등이 활약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다. 레이먼드 루비컴이라는 카피라이터가 스타인웨이의 광고를 맡은 1919년에도 역시 그랬다. 그런데 그는 이전 광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타인웨이에 대한 자료를 훑어봤다. 그 결과 알게 된 사실은 이 피아노가 바그너 이후 거의 모든 음악계 거장들이 사용한 악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느 광고도 이런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저 잘 꾸며진 거실에서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 광고 일색이었다."

전설적인 음악가들이 쓴 피아노. 곧 신화가 될 최고 거장들이 지금도 쓰는 악기. 때가 되면 죽어 사라질 아리따운 여인네들을 위한 악기가 아닌 '불멸자(immortal)'들을 위한 명기…. 생각이 여기에 미친 루비컴의 머리에는 '불멸의 악기'라는 헤드라인이 떠올랐고 이런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쏟아지는 광선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늙은 피아니스트(리스트를 무척 닮았지만 실제로는 모델이었다)를 등장시켰다. 이렇게 탄생한 광고는 지금도 '불멸의 광고'로 남아 있다.

요즘 전직 대통령들을 찾는 정치인들이 부쩍 늘었다. 공과를 떠나 죽은 대통령들에 대한 맹목적 향수도 커지고 있다. 한때는 정리 대상으로 꼽히던 이들로부터 후계자라는 말을 들었다고 좋아 떠드는 이도 있고 이들에게 냉담한 대우를 받았다고 실망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모두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려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으로 보인다. 우리 정계에서 스타인웨이처럼 제대로 된 불멸의 지도자는 아직 요원한 바람일 뿐일까.

김동완 그레이프커뮤니케이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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