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용 한상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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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춤에는 우리의 시대정신, 춤추는 우리 젊은이들의 의식과 고뇌의 몸부림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획기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의, 그러면서도 관객과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춤을 만들고 싶습니다.』
한상근씨(30). 서울 시립무용단 단원. 전승무회 회장. 블루진의 바지와 점퍼, 그 안에 티셔츠와 스웨터를 받쳐입은 편안하고 기능적인 차림. 하늘색나일론에 스펀지를 넣어 누빈 큼직한 부츠와 함께 캐주얼한 차림을 즐기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그가 바로 탈춤·학춤·검무 등 우리춤의 뿌리를 찾아 규명하고, 몸에 익히고 다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입김을 불어넣어 새로운 창작 한국무용을 만드는 작업으로 무용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장본인이다.
창작 한국무용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은 비단 한씨 혼자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탐색과 몸부림과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이 절실한 만큼, 그의 작품이 두드러져 관심을 모으는 까닭이다.
작년 12월 9∼10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의 서울 시립무용단 창작무대에서 공연된 『무초』는 그의 첫번째 안무작품이었다. 공연시간 30분 남짓.
『하나의 이름없는 풀의 씨앗이 황량한 땅에 떨어져 싹이 돋고, 잎이 피어나 성장해 열매맺기까지의 생존의 자연이치를 춤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 씨앗이 비바람, 햇볕 등 자연섭리에 순응하면 큰 풀이되지만 아니면 흔적도 없이 스러지지요.』
이 작품에서 한씨는 대극장 드넓은 무대를 태극무늬 새겨진 천으로 3겹을 쌌다. 14명의 무용수가 출연. 무대장치와 의상은 단순화시켜 강렬한 흑백의 대비로 처리했다.
음악은 한국 국악계에서 실험적인 작업에 앞장서온 김영동씨가 맡았다. 전자오르간 소령 양금 인성을 조화시킨 새로운 시도였는데, 이조시대 상놈의 춤, 양반의 춤의 춤사위를 함께 어울리게 한 춤과 딱 떨어지게 맞아들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한 한씨는 73년 우연한 기회에 무형문화재 제34호인 강령탈춤의 인간문화재 박동신·김실자·김정순씨로부터 탈춤을 배워 이수자가 되었다.
무용수로서 그의 춤이 춤사위가 활달하고 힘이 있어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이런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78년 서울 시립무용단 단원이 되어 문일지씨의 제자로 정식 한국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문씨의 표현에 따르면『가슴속에 춤을 안은 뜨거운 열정』을 가진 까닭에 많은 춤을 단시일에 자기 것으로 하여 이제는 한국무용계에서 귀한 존재인 중견 무용수로, 앞날이 촉망되는 안무가로서의 위치를 굳힌 것이다.
83년 3월부터는 한국무용 아카데미의 일원으로 창작 한국무용의 소극장운동에 참가, 안무가로, 무용수로 확약했다. 10월에는 새로이 7명의 동료들로 구성된 전승무회의 회장직을 맡아 우리춤의 뿌리를 캐고 익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오는 5월에 첫 공연을 갖는다.
창작 한국무용에 뜨거운 의욕을 가지고있는 그에게는 하나의 우회작전이라고 할까. 우선 우리것을 철저히 알고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굳다.
『우리춤을 원형대로 보존하는 것, 그것은 나름대로 필요하고 의미있는 작업입니다. 그와 함께 우리것에 바탕하여 새로운 시대정신이 깃든 오늘의 춤을 추는 작업도 병행돼야할 것입니다. 후자의 작업을 저의 평생의 업으로 정하고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언젠가「단군신화」「코리아환상곡」을 자신의 안무로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또 많지 않은 한국의 남성무용수들이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 서로 격려하고 힘을 합해 작업을 하고싶다고도 말한다.
서울 시립무용단에 근무한지 6년째. 그는 한달 봉급이 25만9천원. 연극을 하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그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어 결혼 생각을 못하고 있다.
『한때는 무용을 계속할 것인가 고민했지만, 지금은 무용을 위한 고민만 하려고 합니다. 제겐 춤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박금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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