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984년」에 거는 희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핵무기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50년대 동서의 냉전시대가 끝났던 60년대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이 지배적이었다. 세계는 기본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고 미래는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70년대 후반기에서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삶의 기분은 불안과 절망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패배주의의 그늘 아래서 비관적인 운명론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어두운 세계의 밤의 시대를 살고 있다.
l984년의 새 아침이 밝아오면서 세계도처에서는 「조지·오웰」의 반 유토피아 소설 『1984년』이 완전 매진되었다고 한다. 「오웰」이 예언을 통하여 경고한 「l984년」은 그가 끝없이 사랑하여 마지않았던 가치·덕·정의·자유·평등이 사라지고만 세계, 인간의 품위가 소멸된 세계, 강제수용소, 경봉. 2+2=5라는 허위의 슬로건, 「인간의 얼굴을 짓밟는 군화」에 의하여 상징되는 종말의 세계다. 1984년은 현재이고 지금은 바로 절망의 때, 종말의 때다.
비인간화한 전체주의 사회의 악마성을 상징하는 「대형」의 성공의 비결은 이 독재자가 전 국민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감시할 수 있었다는데 있다. 데모크래시가 컴퓨터크래시로 변모하여 가고있는 오늘날 「오웰」의 예언은 l백37가지 중 1백가지 이상이 적중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칼럼니스트「잭·앤더슨」은 1984년에 일어날 일로 「안드로포프」의 실각, LA올림픽 테러참사, 제2의 쿠바 미사일 위기, 새로운 유류 파동 등을 예언하였다.
작년 가을부터 KAL기 격추사건과 아웅산폭발사건, 계속되는 중동전쟁, 레바논폭발사건을 비롯하여 명성과 영동 등의 대형금융사고 등등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사건이 계속 일어나서 불안과 초조 속에서 한해를 넘기고 새해를 맞이하였다.
새해에 기다리고 있었던 소식은 나이지리아군사 쿠데타, 극동지역에 설치된 소련의 암살특수부대, 미국의 유네스코 탈퇴, 이스라엘기의 레바논 맹폭과 세계도처에서 일어난 인재와 지재 등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분을 「카를·야스퍼TM」의 말을 빌어 표현한다면 「폭력의 바다」위를 표류하고 있다는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비행사들이 지구를 무한한 우주공간에 떠있는 하나의 공처럼 밖에서 구경할 수 있도록 작아진 지구호라는 우주선은 과학기술에 의해 재구성된 폭력에 의하여 병들고 있다. 우리를 비인간화시키고 있는 핵전쟁의 위협, 빈곤과 기아, 인격의 죽음, 자연의 죽음, 이런 것들이 현대세계에서 읽을 수 있는 종말의 상징들이다.
미국인의 65%는 『새해에 큰 전쟁 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지구 촌락의 최후의 종말을 알리는 운명의 시계바늘은 자정 4분전이었던 것이 3분전으로 다가왔다고도 하고 바로 1초 전이되었다고도 한다.
군축협상을 거부하고 정쟁에 말려든 크렘린의 핵 단추는 중동전쟁과의 관련에서 언제 눌려질는지 모른다. 팔레스타인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이라크전쟁에서 지구는 매일 죽은 자들의 피로 가득 넘치고있다.
그래도 1984년을 맞이하면서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1년 동안의 세계의 군사비는 6천6백억 달러를 넘고있는데 매일 4만 명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와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죄 없는 어린이들이 1년에 거의 1천5백만 명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4O억 명을 넘어선 지구촌락에서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는 사람의 수는 4억 명이고 굶어서 죽는 사람의 수는 해마다 5천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일본요정에서 버리는 음식은 연간 1천만t이고 미국의 경우는 수억t이라고 한다. 이 같은 낭비가 한쪽에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극한적인 빈곤이 있다. 이 같은 낭비구조 속에서 살고있는 이들이 감히 제3세계를 향하여 새해의 희망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까?
가정의 붕괴, 지역의 붕괴, 공동체의 붕괴와 해체 때문에 「고아와 과부」, 노약자와 어린이와 여성과 같은 지극히 작은 자들이 스스로의 휴머니티가 해체 당하는 인격의 죽음, 인권의 상실이라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 인격의 죽음을 강요당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 아닌 사람들이 도처에서 신음하며 절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나라에도 6·25의 전쟁체험이나 기아체험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 새로운 한국인이 사회의 전면에 나타났다. 소위 풍요한 사회를 살고 있는 세대다. 젊은 세대의 새 문제는 빵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죽음이라는 소위 영적인 위기, 정신의 죽음이다. 그래도 우리는 새해를 새로운 희망의 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몇 안 되는 선진국들이 지구의 자원을 독점하며 수탈하고 낭비하면서 인간이라는 종의 존속을 위협하고 있다. 지구적인·대규모적인 환경파괴의 진행이 자연의 죽음을 부르고 있다.
후진국의 산들을 벌거벗기고 「해외경제협력」이라는 미명아래 공해기업을 수출하며 강과 바다에 산업폐기물을 버리고 있는 잘 사는 나라들. 그래도 새해에 희망을 걸어서 좋을까?
우리는 이 같은 지구촌락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여 나갈 수 있을까? 물론 정치적·경제적 대책이 적절하게 세워지고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것, 곧 현대인의 정신성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핵전쟁에 의한 전면적인 인류의 파멸의 날이 찾아온다고 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각 개인의 내면의 영혼, 전체주의 정치권력의 지배가 흔들어 놓을 수 없는 각자의 내면의 영혼을 지상의 법정으로 삼게될 때, 그때 비인간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지구촌락은 윤리적 질서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 아닐까?
「카터」전 대통령의 정치철학에 깊은 감명을 줬다고 하는 신학자「라인홀드·니버」는 그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만일 권력을 타도하기 의해서 권력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이 새로운 권력을 윤리적인 것으로 할 수 있을까?」라고 물으며, 이렇게 스스로 염려하며 대답했다. 「만일 정치적 현실주의가 사회에서의 이성적·도덕적인 것의 힘을 신뢰하지 않고 현실주의만을 강조한다면 세력균형만이 사회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되어지지 않을까?」사람은 인간을 초월한 분(신)과 인격적으로 관계하는 내면적인 영혼을 최종적인 법정으로 삼을 때에만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초월자와 관계된 양심의 소리에 복종하면서 살아가려는 한사람의 「소크라테스」가 나타나지 않는 한 1백 명의 「키신저」가 정치수완을 부린다고 하여도 지구촌락의 혼란과 혼돈은 수습되지 못할 것이다.
「1984년」이 희망의 새해가 될 수 있는 길은 초월자 앞에 선 개체인간의 존엄성을 자각하는데 있다.
과학기술문명의 허무성을 실감한 구미의 반 문화운동의 기수들이 스스로의 영혼의 내면을 고요히 들여다보면서 내세웠던 슬로건을 연상하게된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가지는 것(One man, one soul)」, 카톨릭의 한국선교 2백주년, 개신교 선교 1백주년을 맞게되는 뜻깊은 새해 1984년을 희망의 해로 맞이하기 위하여 「바울」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서 좋을 것이다.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보지 못하는 희망이야말로 참된 희망이다」(롬 8:24).

<필자 약력>
▲1927년 평남 진남포 출생▲감리교 신학대학 졸▲한신대 대학원 졸▲미국 드루대 신학부졸▲스위스바젤대 대학원 졸(신학박사)▲현 감신대 대학원장▲사서 『「카를·바르트」신학연구』(공저)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