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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 흙 꾸러미 빼곡 … 주민들 "귀향 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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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달 25일 후쿠시마현 이이타테무라(飯館村) 에선 방사능 오염 가능성이 큰 지표면 흙 5㎝를 들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방사능 흙’을 담은 1t짜리 꾸러미가 늘려 있다. [이이타테무라(후쿠시마)=김현기 특파원]
① 이이타테무라 면사무소 앞에서 간노 무네오 ‘후쿠시마 재생의 모임’ 이사가 ‘시간당 0.38마이크로시버트’라고 나온 수치를 가리키고 있다. ② 후쿠시마시 마쓰카와마치(松川町) ‘미네로 목장’에서 마시코 히로토 씨가 소를 돌보고 있다.

지난달 25일 일본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으로부터 북서쪽으로 38㎞ 떨어진 이이타테무라(飯<8218>村).

 낮에는 출입이 가능하지만 밤에는 빠져나와야 하는 ‘거주제한구역’이다. 마을 중심에서 버스를 타고 국도 399호선을 통해 원전이 있는 남쪽으로 접근하자 방사능 측정기가 갑자기 ‘삐릭삐릭’하며 요동을 쳤다. 산길을 굽이굽이 도는 비탈길. 화면은 이미 ‘고농도’를 알리는 새빨간 색깔로 변해 있었다.

 측정치는 시간당 7.04마이크로시버트. 일반인의 피폭 허용 기준치인 약 0.19마이크로시버트의 무려 37배다. “유리창으로 차단돼 있어 그렇지 버스 밖은 이보다 1.5배 정도 높다”(간노 무네오 ‘후쿠시마 재생의 모임’ 이사)는 설명에 공포감이 엄습했다.

 산길을 벗어나니 다시 수치는 내려갔다. 원전으로부터 32㎞ 지점. 바리케이드를 치고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이이타테무라 나가도로(長泥) 지구에 내리자 방사능 수치는 2.7마이크로시버트 수준(기준치의 14배)이었다. 원전에서 30㎞나 떨어져 있는데도 나무와 토양에 아직까지 방사능이 수북이 쌓여 있는 핫스팟(Hot spot·주변보다 방사능수치가 높은 지역)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같은 날 일본 정부가 발표한 ‘이이타테무라 방사능 공식 측정수치’는 0.38. 도쿄대 이공계 교수를 지낸 후 은퇴한 다오 요이치(田尾陽一) ‘후쿠시마 재생의 모임’ 이사장은 “이미 다 제염(除染·방사능 오염제거)작업을 끝낸 평지 몇 곳에 측정기를 세워놓고 공식 수치라 발표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다”고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마을의 풍경 또한 삭막하긴 마찬가지였다. 풍요롭던 논밭에는 시커먼 방사능폐기물 꾸러미들이 수백 개씩 흉측하게 쌓여 있었다. 현재 일 정부는 후쿠시마 일대의 지면 흙을 5㎝ 들어내고 그 위에 새 흙을 뿌리고 있다. 마을에 주민이 돌아올 때를 대비한 ‘마을 살리기’의 일환이다. 그 과정에서 나온 ‘방사능 흙’과 나뭇잎 등을 담은 꾸러미들이 마을을 점령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마을을 떠나있는 주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이타테무라에 살다 원전에서 62㎞ 떨어진 후쿠시마시로 피난해 있는 간노 유미(神野友美·29)는 “이이타테무라 전체에서 방사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에 아들(5살)과 딸(2살)을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부와 주민의 생각이 따로 헛돌고 있는 후쿠시마의 현실이다.

 실제 2박3일 취재 내내 후쿠시마의 주민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불신’이었다. 

 지난달 27일 오전 고오리야마(郡山)시에서 제염 운동을 펼치는 ‘3a(안전, 안심, 액션) 고오리야마’의 스즈키 요헤이(鈴木洋平)와 함께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나섰다. 인근 후쿠야마마치(福山町) 고켄(行健) 초등학교 학생들이 통학하는 국도 49호선이다.

 약 30분간 걸어가면서 통학로 길가에 측정기를 갖다대니 수치는 시간당 1.764 마이크로시버트까지 뛰어 올랐다. 기준치의 거의 10배 수준. 원전에서 59㎞나 떨어져 있어도 결코 안전지대는 아닌 것이다. 

 3a사무실에서 만난 고오리야마의 부모들은 자녀 건강에 대한 우려를 호소했다.

 “2012년 여름 아이 둘을 데리고 갑상선암 초음파 검사를 하는데 ‘우린 잘 모른다’며 아예 주민들의 질문을 원천 차단하더군요. 그걸 보고 아, 이건 ‘이상 없습니다. 이상 있어도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관련 없습니다’를 대전제로 한 검사란 생각이 들어 이후 아예 가질 않아요.”(군지 에리·37) .

 ‘아이들을 방사능으로부터 지키는 전국 소아과 네트워크’ 야마다 마코토(山田<771F>·73) 의사는 “현재까지 나온 숫자(후쿠시마 18세 이하 37만 명 중 86명 확진, 23명 의심)만 봐도 원전사고의 영향이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며 “솔직히 암보다 혈액 질병이 먼저 나타나는데 정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혈액검사를 하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4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후쿠시마 주민들은 또 다른 삶의 갈등까지 떠안고 있었다.

 3a의 노구치 도키코(野口時子·49) 회장은 “최대한 방사능을 의식하며 조심하려 하지만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는 주변의 눈총과 따돌림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방사능에 민감한 여성(부인)과 둔감한 남성(남편) 사이의 의견대립도 심각해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후쿠시마를 재생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뭉클했다.

 소와 목장을 동시에 잃은 4명의 낙농업자가 후쿠시마시에 공동으로 설립한 ‘미네로 목장’은 2012년 소 45마리에 하루 원유생산량 145㎏에서 시작, 지금은 소 155마리, 하루 생산량 4500㎏로 연 1억3000만 엔(약 12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업체로 성장했다. 이익금은 전액 지역사회로 환원한다. 원전에서 5㎞ 떨어진 나미에마치(浪江町) 출신의 농장책임자 곤노 히로시(紺野宏·55)는 “정부는 30%밖에 믿지 않는다. 하지만 후쿠시마의 저력은 100% 믿는다”고 말했다.

 원전사고로 일자리를 잃은 후쿠시마 여성 농산물 가공업 종사자들이 모여 만든 ‘엄마의 힘 프로젝트’.

 후쿠시마 유기농 야채로 도시락을 만들어 후쿠시마는 물론 일본 전국에 배달·판매하는 단체다. 농산물 방사능 기준도 국가(㎏당 100베크렐 이하)보다 훨씬 엄격한 20베크렐 이하를 고수한다. 와타나베 도미코(渡邊とみ子·62) 회장에게 이유를 물었다.

 “우리는 분명 원전사고의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후쿠시마인으로서의 의무감입니다.” 입술을 꽉 깨문 그의 눈가에 고인 눈물에서 ‘비운의 땅’ 후쿠시마의 지난 4년의 고난과 인내를 엿볼 수 있었다.

후쿠시마(이이타테무라·후쿠시마시·고오리야마)= 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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