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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쏭달쏭 북·중이야기(11)] 김정일과 후진타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후진타오의 화평발전을 북한에 적용하면 중국은 적극적인 외교간섭으로 한반도에서 전쟁가능성을 줄이고 평화지향적인 모습을 국제사회에 선전하는 이중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후진타오는 200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국가주석이 되자마다 ‘북한 핵위기관리를 위한 영도소조’를 새롭게 구성했지요. 조장은 본인이 직접 맡았습니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국 대통령 특사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개발 의혹을 제기했고 이에 북한이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면서 발생한 제2차 북핵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지요.

후진타오는 장쩌민보다 김정일에게 공격적이었습니다. 중국 제4세대의 성향이라고 보면 됩니다. 북한의 돌발적인 행동을 과거처럼 감싸고 이해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후진타오는 2003년 8월 김정일에게 “끊임없는 전쟁 준지를 중단하고 허약한 경제를 건설하는 일에 집중하라”고 충고했지요.

그는 자신과 중국의 원로 세대는 전통적으로 북한과의 밀접한 동맹관계를 중시했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보장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시사하면서 3가지 제안을 했어요.

첫째, 북한이 경제자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둘째, 중국식 개방정책을 추진하며
셋째,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중단함으로써 주변국들과 관계 개선을 한다면 중국이 앞장서서 북한의 안보를 국제적으로 보장하고 북한 경제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지요.

그의 제안은 왕이 현 외교부장(8월 7일 방북), 쉬차이허우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8월 20일 방북) 등의 대북 외교사절을 통해 북한 지도부에 전달했지요.

후진타오와 김정일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6자회담입니다. 6자회담은 2003년 8월 27일~29일 열린 제1차 회담을 시작으로 2008년 12월 수석대표회의를 끝으로 현재까지 열리지 않고 있어요.

제1차 6자회담으로 얘기하기 전에 그 보다 4개월 앞서 열린 3자 회담(2003년 4월 23~24일)부터 시작하지요.

3자 회담은 중국이 2003년 3월 첸치천 부총리, 왕이 부부장, 푸잉 아주국장을 김정일이 잠시 묵고 있었던 북한 삼지연에 보내 그에게 다자회담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면서 시작됐어요. 북한이 NPT를 탈퇴한 지 2달여만입니다. 과거 제1차 북핵 위기때 ‘강 건너 불구경’하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어요. (계속)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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