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크리스머스 카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우체국마다 초만원이다. 연하장 인파. 12월 한달동안 우리나라에서 오가는 크리스머스 카드와 연하장은 자그마치 5천2백50만통이다. 이것을 한줄로 늘어 놓으면 9천5백km. 지구 적도반경의 1·5배나 된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그런 풍속이.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서양문물의 전래나 우편제도의 기원을 보면 1백년도 안된 일 같다.
정작 서양에서 크리스머스 카드가 고안된 연대도 백년남짓 밖에 안되었다. 영국의 미술교육가 「헨리·콜」경이 1843년 왕립미술관 아카데미 회원인 「J·C·호슬리」라는 사람에게 석판화를 부탁했었다.「콜」경은 그무렵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박물관의 초대관장이었다. 한가한 자리는 아닌듯, 그는 시간에 쫒겨 편지를 쓰는 대신 카드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돌릴궁리를 했다.
그 도안을 부탁받은「호슬리」는 빅토리아조 풍의 가족파티를 구상했다. 조부모, 부모, 자녀등 3대가 크리스머스를 축하하기 위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풍경이다. 그자리에 미처 참석하지못한 가족, 그러니까 이 석판화의 카드를 받아볼 사람을 위한 건배.
재미있는 것은 그시절 이 카드가 일으킨 사회적 물의다. 「건배하는 모습이 음주를 장려하는 내용이라는 비난이 빗발치듯 했다.
그런 와중에도 1천장이 인쇄되었다. 더러는 1실링의 값으로 팔기도 했다. 크기는 세로 12cm, 가로 8cm. 요즘의 카드보다는 훨씬 작다. 「쿨」경의 아이디어가 「산업」으로 발전한 것은 1862년 무렵이다. 런던의 인쇄회사 찰즈 구드올앤드 선즈가 만화잡지「펀치」의 화가「C·H·베네트」에게 카드도안을 의뢰했다. 그것이 제2회 만국박람회에서 상품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이때의 풍속으로는 명함 크기의 카드에「메리 크리스머스」, 또는 「해피 뉴 이어」의 문구만을 넣었었다. 그 후로 경쟁회사들이 나오면서 설경과 같은 자연 풍경이 그림으로 등장했다.
영국에선 한때 그런 카드가 너무 남발되어 1873년 12월의 타임즈지엔 『올해엔 카드를 보내지 않습니다』라는 광고가 난 일도 있었다. 주로 귀족들이 그런풍속을 하찮게 생각했다.
요즘은 크리스머스 카드의 도안이나 인쇄술을 보면 그나라의 문화수준을 짐작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니, 카드를 펼치면 노랫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다. 멀지않아 육성녹음으로 인사를 나누는 카드도 등장하지 않을까.
그러나 따뜻한 마음이 깃들지 않은 카드는 아무리 호화판이라도 별로 감흥이 없다. 하다못해 친필 서명쯤은 해야 그쪽의 진기를 느낄수 있을것 같다. 지금도 그런 따뜻함의 표시는 늦지 않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