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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잃어버린36년|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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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직접적산물이자 최대의 성과였다. 또한3·1운동의 비조직적 성격을 반성하고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지도력을 확립하기위한 통일조직은 당위이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처음 세갈래서 출발했다. 상해의 임시정부와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정부, 시베리아의 대한국민의회가 그것이다. 임시정부수립에 가장먼저 눈을뜬것은 시베리아의 교포들이었다. 이곳에는 일찌기 의병대장 유인석 이범윤 이동휘등이 진출, 무장항일을전개했고 1917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로한족회를 결성, 독립운동의 기반을 확보하고있었다.
3·1운동 당시 50만명에 달했던시베리아의 교포들은 19년2월 전로한족회를 대한국민의회로 개칭하고 3·1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나자 임시정부수립을 서둘러 3월17일 독립선언에 이어 21일 임시정부각료의 명단과 결의문을 발표했다.

<3·1운동의 성과>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박영효, 국무총리이승만, 군무총장이동휘등이었다.
시베리아지방 못지않게 임시정부소재지로 적합한곳은 교통의 요충상해였다. 당시 상해는아편전쟁이후 세계열강이 다투어 조계를 만들어 동양최대의 자유항이됐고 특히 프랑스의 조계지는 다른나라보다 활동이 자유로왔다.
이곳에는 국내 각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망명해와 일경의 비밀정보보고에는 3·1운동당시 그 숫자가 1천명에 이른것으로 기록돼있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 독립임시사무소를 두고 총무 현순의이름으로 각국 공관에독립선언서를 돌렸다. 19년4월10일 하오10시부터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서 임시정부수립을위한 임시의정원이 개회됐다. 현순 신익희 조성환 조소앙 이광수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신채호 여운형등 29명의 의원이 참석했다.
11일 상오10시까지 계속된 의정원회의에서는 의정원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를 선출했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관제는 국무총리제를 채택했다.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군무총장 이동휘, 외무총장 김규식등이었다. 특기할것은 국무총리의 인선절차와 선거과정이 민주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국무총리 인선에는 먼저 각 의원이 9명의 후보자를 천거하고 이어 그중에서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 3인을 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한 다음 다시 무기명투표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그러나 각지에서 몰려든 인물들은 서로 사상과 정치적배경이 달라 일치된 행동으로 나가기위해서는 넘어야할 산이 많았다.

<당시 의회에 참석했던 여운형의 훗날 회고> 『임시정무조직에는 첫회합부터 주도권을 둘러싸고 두갈래의 의견이 대립했다. 본국과 일본에서온 대표들, 이른바 국내파는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지도전개한 33인이 중심이 돼야한다는 것이었고 해외파는 합방이후 해외로 망명하여 생명을 내걸고 싸워온것이 해외독립운동자들인데 독립선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33인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조직하는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비공식토의에서 누구를 정부의 수반으로 할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되자 손정도인가 현순인가가 이승만이 적임자라고 했다. 그러자 신채호가 자리에서 벌떡일어나<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전에 팔아먹은×이다>라고 했다.
그때 누가<잘 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단정하는것은 옳지않다>고하자 신채호는<너희같은 더러운×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지않겠다>며 나가버렸다.

<주도권싸고 대립>
신채호가 이승만을 비난하는데는이유가 있었다. 18년10월1일 미국에있던 대한인국민회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한국대표로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3인을 선출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과의 관계를고려, 우리대표의 파리행을 거부했고 이에 이와 정은<한국이 저 불법 포악한 일본의 통치하에는 절대 있기를 원치않고 나중에 독립할 목적으로 미국의 위임통치를 받고자한다>는 내용의 위임통치청원을 미국무성과 신문에 발송했다. 신채호가 이승만을 반대한것은 이것때문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이왕가의 대우문제로 격론이 일기도했다. 임시정부에서 이왕가롤 우대해야 한다는측은 조완구등 연로층이었고 여운형등 청·장년층은 이에 반대했다.
이 문제는 격론끝에 표결에 붙여졌고 그 결과 우대론의 우세였다. 임시정부 헌법 제8조는 <대한민국은 황실을 우대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소동속에서도 조소앙의 유머섞인 발언으로 회의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고 이틀간의 회의끝에 임시헌장을 의결하고 선서문과 정강을 공포했다. 국호는 대한민국, 정체는 민주공화제였다. 이무렵 3·1운동의 진원지 서울에서도 임시정부가 태동하고 있었다.
3월초순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이규갑등 국내인사들은 3·1운동때 비밀연락을 담당했던 한남수 홍면훈 민강등과 논의하여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열기로했다.,
3월16일 서울내수동64번지 한성오라는 현직검사의 집에모여 의논한결과 4월2일 인천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수립, 이를공표하기로 합의했다.
현직검사의 집에 모인것은 검사출신으로 당시 변호사였던 홍면희의 계략으로 일경의 눈을피하기위해서였다.
4월2일 회의결과 4월23일 국민대희를 서울에서 다시 열기로했고 자금은 천도교측에서 부담키로했다. 그러나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국민대회는 열지못하고 대신 국내인사들이 작성한 국민대회취지서와 13도 대표자명단, 임시정부 조직과정책, 선포문등이 인쇄·배포됐다.
한성정부의 조직사실은 UP통신의 전파를 타고 세계를 돌았다.
임시정부 각원명단에는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외무총장 박용만등 대부분이해외인사들이였다. 이는 국내인사 대부분이 감옥에 있었고 임시정부의 활동도 국내에서는불가능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국내수립 누설돼>
여러갈래의 임시정부수립은 독립운동의 역량자체를 분산시킬뿐아니라 대외적인 외교활동에도 혼선을가져와 각정부의 통일을 요구하는소리가 높앞다.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은시작부터 암초에 부딪쳤다.
대한국민의회측은 지리적여건이나 교포의 수로보아 정부를 노령에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상해임시정부측은 국민의회측의 주장은 인정하지만 일본군이 노령에 진주할가능성이있어 안전치못하고 소련의비협조가 예상되므로 국제도시인 상해가 활동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한성정부측은 국내에 정부를 두는것은 불가능하나 한성정부가3·1운동의 발상지인 서울에서 조직됐고 13도대표의 총의에서 성립됐기때문에 통합된 정부의 소재지가 어디이든 정통성은 한성정부가 가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임정의 통합운동은 19년5월 미국의 안창호가 2만5천달러를 갖고 상해로 오면서 활기를 띠었다. 그는 상해임정의 수석국무위원자격으로, 각정부대표들과 협상을 벌인끝에 법통은 한성정부를 계승하고 정부의 위치는 당분간 상해에둔다는 합의점에 도달했다.
이에따라 상해임시의정원에서는 7월10일 노령국민의회와의 합병을 결의했고 8월19일부터9월17일까지열린 제6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한성정부와의 통합을 승인하고 개헌과 정부개조의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이과정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자칭문제를 둘러싸고 말썽이 벌어졌다. 당시 미국에있던 이승만은 한성정부가 조직되자 19년5월 워싱턴콘티넨털빌딩에 집정관총재사무소를두고외교활동을 벌이고있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면서도 국무총리라는 상해임시정부의관명을 쓰지않고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명칭을 사용했으며 대외적으로 「프레지던트 로서 행세했다.
상해임정에서는「프레지던트」로 행세하지말고 「집정관총재」로 칭하라는 전문을 보냈고이로인해 상해와 워싱턴간에는 전문을 통해 공방전이 벌어졌다.
안창호가 이승만에게 보낸 8월25일자 전문 <처음에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제도이며 어느정부에나 대통령직명이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금은 집정관총재직명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할것이요, 헌법을 개정하지않고 대통령행사를하시면 헌법위반이며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행세를 하지마시오.>이승만의 8월26일 답전.

<우리가 정부승인을 얻으려고 전력을 다하는데 내가 대통령명의로 한국사정을 발표했기때문에 지금 대통령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것이니 떠들지 마시오.>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이승만의 대통령칭호문제는 여러차례의 전문이 오갔으나 타결을 보지못하다가 안창호가상해인사들을설득, 19년9월6일 임시헌법개정에서 대통령제를 채택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전문으로 공방전>
이리하여 9월11일 헌법을 공포하고 신내각을 성립시킴으로써 단일정부의 출범을 보게됐다.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층장 노백린등이었다.
임시정부는 대통령칭호를 합법화시키기는했지만 실제로는 내각책임제의 요소가 많았다. 즉 대표권행사는 임시대통령에게 전임하되 행정권은 국무원이 관장한다는 것이었다.
국무원의 임명은 임시의정원의 동의를 얻도록하고. 임시의정원은 임시대통령이나 국무원을 탄핵할수있게했다. 또 특이한것은 임시대통령의 임기규정이 없는것이었는데 이는 후일이승만과 상해임정간에시비를 불러일으키는 불씨가됐다.
정부를 유지하기위한 재정도 확보돼 있지않았고 대부분의 각원도 상해에 있지않았다.
임시정부는 지방행정조직과 동시에 재정확보를 위해 19년6월15일 재무부령1호로 인구세의징수를 공포했고 11월20일 총액4천만원의 애국공채를 발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못했다.
19년8월21일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독립』 (후에 독립신문으로 개칭)을 발행했다.
사장겸편집국장에 이광수, 기자에 조동우·차이석등이었으며 21년 이광수가 일제의 회유로 귀국함에따라 쇠퇴했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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